경찰의 일방적 발표를 받아쓰는 동아일보
10월 18일 자정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발동되었지만, 그로부터 불과 15시간도 지나지 않은 그날 오후 2시경 마산의 경남대에서 시위가 터졌다. 학생 1천여 명이 “유신헌법 철폐하라”, “군사독재타도하자”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시위를 시작한...
10월 18일 자정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발동되었지만, 그로부터 불과 15시간도 지나지 않은 그날 오후 2시경 마산의 경남대에서 시위가 터졌다. 학생 1천여 명이 “유신헌법 철폐하라”, “군사독재타도하자”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시위를 시작한...
동아일보는 1932년 5월 1일자부터 ‘난데없는’ 기사들을 잇달아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 날짜에는 1면에 <수류탄 사건의 파동>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상해 연합] 일·중 정전교섭은 일본 대표자 재위와 또 범인 배후의 정치적 색채...
5.16쿠데타 당시 '민정이양'을 약속했던 박정희는 그 후 몇 차례 말을 바꾸면서 이른바 '민정이양 번의'라는 희대의 논란을 자초했다. '군복 벗으면 민정 참여 가능'이라는 조야한 논리를 내세웠던 박정희, 그러나 1963년 2월 미국 케네디...
1979년 10월 16일 저녁 7시 40분 청와대 옆의 궁정동 '안가'에서 총성이 울렸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짜 2면에 <비상 사태와 국민적 각오 / 박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 자율적 질서 유지를 당부한다>라는 사설을 실었다. 박 대통령의...
1932년 9월 12일 이봉창 의사 재판에 관한 보도가 실렸다. <금년 1월 8일 돌발한 앵전문외 대역 사건 범인은 경성 출생 이봉창>이라고 기사가 나왔다. 금년 1월 8일 오전 11시 44분 천황 폐하께옵서 관병식에 행행하셨다가 환어하시는 길에...
결국 민정이양 약속을 뒤집은 박정희는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를 겨우 15만 여표로 따돌리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민정이양 번의' 논란 때마다 박정희를 지지했던 조선일보는 역시 당선을 반기며 축하를 표했다. ...간신히...
동아일보는 1면 머리기사와 함께 ‘워싱턴 특파원 발 2단 기사로 미국 국무성의 발표를 보도하면서 이번 사태가 정치적으로도 심각한 상황임을 시사했다. 민주화 저해면 한미관계 차질>이라는 제목의 그 기사는 국무차관 워런 크리스토퍼의 말을 인용해...
동아일보는 일제의 기관지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1933년 1월 21일자 석간 1면에 <천안 시종입경>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지금 천황 폐화 어차견의 시종무관 천안 각하로부터 국경 경비 경찰관의 노고에 대하여 우악한 성지 및 영지의 어전달을 받고...
1962년 10월과 11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일본 외상 오히라와 함께 주고 받은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박정희 정권이 눈앞의 이익을 위해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철저한 반성 및 정당한 배상을 요구하길 포기하고, '청구권'이라는...
국무총리 신현확은 12월 15일 12·12사태는 진정, 해결됐으며 정치발전 스케줄에 어떤 차질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3일 후인 12월 18일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은 이희성은 담화문을 통해 “군의 기본 사명은 국토 방위에 있으며...
독립운동가 이청천 생사에 관한 널뛰기 보도를 했다. 1933년 2월 1일자 2면 머리에 <정의부, 국민부서 활약하던 이청천(본명 지대영) 피살 판명>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만주 사변 이전까지 북만에 있어서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 00운동단체의...
서울시는 개발 붐을 일으키려 광주대단지가 '신천지'가 될 것처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투기자본이 몰려들어 분양증을 사들이려고 경쟁을 벌였다. 대단지에 남은 나머지 3분의 2 가량의 사람들은 언저리 싼 땅을 사서 판잣집을 지어야 했다. 서울...
군사 반란으로 정권 초기부터 여론이 좋지 않았던 박정희 정권은 굴욕적 한일회담으로 언론인들로부터 숱한 비판에 직면했다. 박정희는 언론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털어놓았으며 결국 1964년 7월 30일, 공화당으로 하여금 '언론윤리위원회법'이라는...
1980년 5월 31일 신군부 계엄사는 10일 동안 국민을 상대로 살육전을 벌인 이른바 ‘광주 사태의 전모’를 발표하고 민간인 1백 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1백70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1백27명, 군인1백9명, 경찰 1백 44명...
1933년 8월 19일 동아일보 석간 2면에는 <이청천 만주에 잠입 / 모종 중대 획책설>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모처 정보에 의하면 작년 9월 아성현방면 일대에 뻗혀 반만반일의 단체를 규합하여 모종의 책동을 계속하던 동아흥성동맹의 중요 간부...
70년대 초 사법 파동과 광주대단지 사건 등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가 고조되자 대학가에서 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졌다. 1971년 9월부터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 등 대학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당면 요구는 학원에 침투한...
‘광주 사태의 전모’를 발표한 바로 그날(5월 31일)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발족시켰다. 국보위는 ‘사회 정화’라는 명분으로 무소불위의 권한 행사에 들어갔다. 정당활동을 봉쇄하고 언론을 주구로 만드는가 하면 민주화운동 조직을...
동아일보는 반만은 바로 항일이라고 보았다. 만주국은 일제 관동군이 세운 괴뢰정부였다. 그래서 국제사회는 만주국 독립을 승인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동아일보는 일본제국의 입장에서 만주 독립을 지지하면서, 이청천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재만 동포의...
박정희는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여론의 눈을 돌리고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폭압적 방식을 동원했다. 바로 10월 유신이다. 1972년 10월 17일 서울 시내에 군 병력이 배치됐고 광화문 부근에는 탱크까지 나왔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국보위는 민심을 얻기 위해 마구잡이식 ‘사회 정화’공작을 벌여 나갔다. 1980년 6월 18일 계엄사는 3·4공화국의 인물들 가운데 공화당 총재 김종필 등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 10명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계엄사는 5월 17일 이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