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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 대지진으로 조선의 '인재'를 탓하는 동아일보

동아일보는 관동 대지진으로 일본인들이 겪은 고통과 피해에 대해 극진한 동정의 뜻을 전했다. 이와 함께 이틀 뒤인 9월 5일자 사설<오호 인재 조선인아 거듭 나자>에서는 엉뚱하게도 조선민족이 최근에 겪은 ‘인재’를 통탄하고 있다. 오호 인재다!...

'베트남 전쟁'으로 '한국의 안보'를 강조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당시 한국에서는 월남이라고 불렀음)정부 대통령 두옹 반 민이 공산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베트콩임시혁명정부’에 정권을 정식으로 이양했다. 30년에 걸친 인도차이나전쟁이 막을 내린 것이다. 동아일보는 5월...

독립과 해방을 부정한 사설 '민족적 경륜'

동아일보는 1924년 1월 2일부터 6일자까지 5회에 걸쳐 <민족적 경륜>이라는 제목의 연속사설을 1면 머리에 실었다. 이 사설은 나라 안팎의 독립운동가들은 물론이고 언론계, 그리고 나아가서 전 조선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동아일보가...

박정희'특별담화'를 대서특필

남베트남 정부가 무조건 항복을 한 4월 30일 이래 북한이 당장 남한을 공격하려 한다는 구체적 정보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미국이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북한이 무력의 무릅쓰고 전면전을 일으킨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박춘금 협박 사건으로 시작된 동아 기자들의 개혁운동

동아일보가 연속사설<민족적 경륜> 때문에 호된 시련을 겪고 있던 1924년 4월 초, 그 신문의 앞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사건이 터졌다. 친일단체인 ‘각파유지연맹’ 간부인 박춘금이 동아일보사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를 요리집 ‘식도원’으로...

검찰이 발표한 '민주구국선언' 내용을 받아쓰기

‘민주구국선언’은 박정희는 물론이고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9호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이 선언은 전 대통령 윤보선과 야당 지도자 김대중, 재야를 대표하는 함석헌 등이 서명하면서 박정희뿐 아니라 유신독재체제의 핵심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음이...

6.10 만세 사건을 이상한 논조로 다루는 동아일보

동아일보는 6월 12일자 1면에 올린 사설<대곡 후의 조선민족>에서 6·10만세 사건을 직접 언급하지 않은 채 민족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자는 아리송한 논조를 펼쳤다.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는 전제시대의 조선인이었니 정치제도상의 모든 힘은 모든...

군부 쿠데타 3일만에 '혁명' 찬양한 조선일보

1961년 5월 16일 0시 15분경 육군소장 박정희 일파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장교 250명, 사병 3500명이 동원된 대대적 군사 반란이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5.16 군사 쿠데타는 명백히 헌법 위반으로서...

일왕의 새해 동정을 알리는 동아일보

조선총독부는 새해가 되면 어김없이 조선어 신문사들에 일왕의 새해 동정을 알리는 보도자료를 보냈던 것 같다. 1931년 1월 2일자 동아일보에는 1면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렸다. 천황폐하께서옵서는 오전 4시 반 기상하옵시어 현소신가전남정에서...

'3·1사건 민주구국선언'을 '명동사건'으로 격하

3월 10일, 검찰이 민주구국선언 사건을 '정부 전복 선동'을 위한 것이라고 발표한 뒤 신민당과 재야세력은 그것을 ‘3·1사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3월 16일자 1면 머리에 실린 기사에도 ‘3·1사건’이라는 용어가 쓰였다....

중앙정보부 창설을 미리 알고 있던 조선일보(1961.6.6.)

5.16쿠데타 직후, 박정희의 헌법 파괴 반란 행위를 '혁명'이라 칭송하던 조선일보는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 창설을 공표되기도 전에 미리 알고 있는 듯한 기묘한 오보를 내기도 했다. 1961년 6월 6일 1면 <기성정치인은 반성 있기를, 김...

YH사건의 본질을 보도 하지 않는 동아일보

1979년 전반기에는 학생운동도 재야 민주화운동도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8월 11일 일어난 ‘YH 사건’을 계기로 정국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역시 뜨거운 정치적 쟁점이 된 그 사건을 8월 11일자 1면 머리기사로...

만주 침략전쟁의 실상을 왜곡해서 전달하는 동아일보

1931년 9월 18일 일본군이 만주 침략을 시작했다. 일제는 그것을 ‘만주 사변’이라고 불렀다. 동아일보는 전쟁의 진상을 왜곡 확대하여 혹세무민하는 조선어 신문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독자들을 현혹하여 전쟁 이재민 돕기라는 일제의...

박정희 정권의 본격적인 '용공 조작'에 가담한 조선일보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2개월 만인 1961년 7월 반공법 선포에 이어 곧바로 민주당 장면 정부를 '용공'으로 몰며 본격적인 '공포 정치'를 시작했다. 조선일보는 박정희 정권이 연일 발표한 '민주당 장면 정권 용공정책 진상' 담화문을 원문 그대로...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보도

김영삼이 의원직을 박탈당한 10월 4일 이후 신민당 의원들이 박정권을 상대로 강경한 투쟁을 벌였다. 이에 동아일보는 여러 날 동안 침묵하다가 10월 13일자 3면에 <정국의 추이를 주시한다>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신민당이 자기 당의 당수에 대한...

'이봉창의 의거'를 '대불경 사건'으로 보도

1932년 1월 10일자 2면 머리에 <대불경 사건 돌발, 어로부에 폭탄 투척>라는 제목으로 이봉창의 의거를 대불경사건으로 보도했다. 8일 오전 11시 44분경 노부가 국정구 앵정정 경시청사 앞에 이르렀을 적에 봉배자 선내로부터 돌연 노부...

언론의 목을 조른 군사정권, 이에 동조한 조선일보

박정희 군사정권은 언론사를 강제로 폐간하고 사주를 '사법살인'하는 등 그야말로 언론의 목을 졸랐다. 1962년 6월 28일에는 '언론정책 25개항'을 발표했고 이는 조석간 복간제를 조간지, 석간지, 일요지 등 단간제로 개편, 통신사는 1~2개로...

'치안본부'의 발표문을 받아쓰기 하는 동아일보

10월 16일 오전 10시경 부산대에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독재 타도”를 외치던 학생 2천여 명은 정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오후 2시경 부영극장 앞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자 경찰기동대가 그들의 머리 위로 최루탄을 쏘아대며...

일제의 '애국기 헌납 운동'을 광고해준 동아일보

동아일보는 1932년 2월 22일자 3면에 <애국기 조선호 헌납에 관한 건>이라는 돌출광고를 내보냈다. 근래 조선 각지에서 비행기 헌납의 의론이 대두하는 것은 국민 일반의 애국심의 발로이므로 국가를 위하여 진실로 경하함을 마지아니하는 바입니다....

희대의 거짓말 '민정이양'과 조선일보

박정희는 1961년 8월 12일 민정이양 계획을 발표했다. 요지는 1963년 여름 정권을 이양하고 총선거를 실시하는 한편 정부 형태는 대통령 책임제로 하겠다는 것이다. 이 8.12 성명의 진의는 사실상 민간에 정권을 순순히 이양하지 않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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