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를 노골적으로 찬양하는 동아일보
1920년 9월 25일자로 무기정간 처분을 받은 동아일보는 3개월반이 지난 1921년 1월 10일 정간 해제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속간호는 2월 21일자로 내게 되었다. 1면에 실린 <속간사>는 민족지를 자처하던 동아일보가...
1920년 9월 25일자로 무기정간 처분을 받은 동아일보는 3개월반이 지난 1921년 1월 10일 정간 해제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속간호는 2월 21일자로 내게 되었다. 1면에 실린 <속간사>는 민족지를 자처하던 동아일보가...
1920년 8월 9일자부터 23일자까지 동아일보는 1면 머리에 7회에 걸쳐 사설 <조선인의 단처를 논하여 반성을 촉하노라>를 연재했다. 이 사설을 통해 ‘민족지’라고 자청하던 동아일보의 ‘민족관’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와 같은 결과로 조선은...
동아일보는 관동 대지진으로 일본인들이 겪은 고통과 피해에 대해 극진한 동정의 뜻을 전했다. 이와 함께 이틀 뒤인 9월 5일자 사설<오호 인재 조선인아 거듭 나자>에서는 엉뚱하게도 조선민족이 최근에 겪은 ‘인재’를 통탄하고 있다. 오호 인재다!...
동아일보는 1924년 1월 2일부터 6일자까지 5회에 걸쳐 <민족적 경륜>이라는 제목의 연속사설을 1면 머리에 실었다. 이 사설은 나라 안팎의 독립운동가들은 물론이고 언론계, 그리고 나아가서 전 조선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동아일보가...
동아일보가 연속사설<민족적 경륜> 때문에 호된 시련을 겪고 있던 1924년 4월 초, 그 신문의 앞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사건이 터졌다. 친일단체인 ‘각파유지연맹’ 간부인 박춘금이 동아일보사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를 요리집 ‘식도원’으로...
동아일보는 6월 12일자 1면에 올린 사설<대곡 후의 조선민족>에서 6·10만세 사건을 직접 언급하지 않은 채 민족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자는 아리송한 논조를 펼쳤다.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는 전제시대의 조선인이었니 정치제도상의 모든 힘은 모든...
조선총독부는 새해가 되면 어김없이 조선어 신문사들에 일왕의 새해 동정을 알리는 보도자료를 보냈던 것 같다. 1931년 1월 2일자 동아일보에는 1면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렸다. 천황폐하께서옵서는 오전 4시 반 기상하옵시어 현소신가전남정에서...
1931년 9월 18일 일본군이 만주 침략을 시작했다. 일제는 그것을 ‘만주 사변’이라고 불렀다. 동아일보는 전쟁의 진상을 왜곡 확대하여 혹세무민하는 조선어 신문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독자들을 현혹하여 전쟁 이재민 돕기라는 일제의...
1932년 1월 10일자 2면 머리에 <대불경 사건 돌발, 어로부에 폭탄 투척>라는 제목으로 이봉창의 의거를 대불경사건으로 보도했다. 8일 오전 11시 44분경 노부가 국정구 앵정정 경시청사 앞에 이르렀을 적에 봉배자 선내로부터 돌연 노부...
동아일보는 1932년 2월 22일자 3면에 <애국기 조선호 헌납에 관한 건>이라는 돌출광고를 내보냈다. 근래 조선 각지에서 비행기 헌납의 의론이 대두하는 것은 국민 일반의 애국심의 발로이므로 국가를 위하여 진실로 경하함을 마지아니하는 바입니다....
동아일보는 1932년 5월 1일자부터 ‘난데없는’ 기사들을 잇달아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 날짜에는 1면에 <수류탄 사건의 파동>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상해 연합] 일·중 정전교섭은 일본 대표자 재위와 또 범인 배후의 정치적 색채...
1932년 9월 12일 이봉창 의사 재판에 관한 보도가 실렸다. <금년 1월 8일 돌발한 앵전문외 대역 사건 범인은 경성 출생 이봉창>이라고 기사가 나왔다. 금년 1월 8일 오전 11시 44분 천황 폐하께옵서 관병식에 행행하셨다가 환어하시는 길에...
동아일보는 일제의 기관지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1933년 1월 21일자 석간 1면에 <천안 시종입경>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지금 천황 폐화 어차견의 시종무관 천안 각하로부터 국경 경비 경찰관의 노고에 대하여 우악한 성지 및 영지의 어전달을 받고...
독립운동가 이청천 생사에 관한 널뛰기 보도를 했다. 1933년 2월 1일자 2면 머리에 <정의부, 국민부서 활약하던 이청천(본명 지대영) 피살 판명>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만주 사변 이전까지 북만에 있어서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 00운동단체의...
1933년 8월 19일 동아일보 석간 2면에는 <이청천 만주에 잠입 / 모종 중대 획책설>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모처 정보에 의하면 작년 9월 아성현방면 일대에 뻗혀 반만반일의 단체를 규합하여 모종의 책동을 계속하던 동아흥성동맹의 중요 간부...
동아일보는 반만은 바로 항일이라고 보았다. 만주국은 일제 관동군이 세운 괴뢰정부였다. 그래서 국제사회는 만주국 독립을 승인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동아일보는 일본제국의 입장에서 만주 독립을 지지하면서, 이청천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재만 동포의...
동아일보는 복간된 지 사흘째인 1937년 6월 5일자 1면 머리에 <근위내각수성립>이라는 일본 통신사의 기사를 실었다. <금일각원명부봉정 오후 1시 반 친임식>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그 기사는 ‘천황 폐하’에 대한 극 존칭으로 ‘장식’되어...
동아일보가 무기정간에서 풀려난 지 한 달 남진 지난 1937년 7월 7일 중국 베이지 교외의 소도시 루거우차오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보병 제1연대 예하의 한 중대가 야간에 전투훈련을 하던 중 몇 발의 총성이 울린 뒤 일본군 사병 한 명이...
중일전쟁이 날로 격화하던 7월 22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천황폐하’의 동정을 ‘송구스런’ 자세로 전하는 기사<천황 폐하 어진념 각궁 전하께서도 어정려>가 실렸다. 황공하옵시게도 성상폐하께옵서는 어피서 1주일 만에 궁성에 원행하옵시어 혹서...
동아일보는 ‘대일본제국’이 중국에서 거두고 있는 ‘승전보’를 적극적으로 전하다가 8월 20일자 신문에 <거국일치의 요>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올렸다. 북지사면은 국지적 소충돌로 시작하여 일지양군의 전면적 전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낭방광안사건이 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