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보도
김영삼이 의원직을 박탈당한 10월 4일 이후 신민당 의원들이 박정권을 상대로 강경한 투쟁을 벌였다. 이에 동아일보는 여러 날 동안 침묵하다가 10월 13일자 3면에 <정국의 추이를 주시한다>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신민당이 자기 당의 당수에 대한...
김영삼이 의원직을 박탈당한 10월 4일 이후 신민당 의원들이 박정권을 상대로 강경한 투쟁을 벌였다. 이에 동아일보는 여러 날 동안 침묵하다가 10월 13일자 3면에 <정국의 추이를 주시한다>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신민당이 자기 당의 당수에 대한...
10월 16일 오전 10시경 부산대에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독재 타도”를 외치던 학생 2천여 명은 정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오후 2시경 부영극장 앞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자 경찰기동대가 그들의 머리 위로 최루탄을 쏘아대며...
10월 18일 자정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발동되었지만, 그로부터 불과 15시간도 지나지 않은 그날 오후 2시경 마산의 경남대에서 시위가 터졌다. 학생 1천여 명이 “유신헌법 철폐하라”, “군사독재타도하자”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시위를 시작한...
1979년 10월 16일 저녁 7시 40분 청와대 옆의 궁정동 '안가'에서 총성이 울렸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짜 2면에 <비상 사태와 국민적 각오 / 박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 자율적 질서 유지를 당부한다>라는 사설을 실었다. 박 대통령의...
동아일보는 1면 머리기사와 함께 ‘워싱턴 특파원 발 2단 기사로 미국 국무성의 발표를 보도하면서 이번 사태가 정치적으로도 심각한 상황임을 시사했다. 민주화 저해면 한미관계 차질>이라는 제목의 그 기사는 국무차관 워런 크리스토퍼의 말을 인용해...
국무총리 신현확은 12월 15일 12·12사태는 진정, 해결됐으며 정치발전 스케줄에 어떤 차질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3일 후인 12월 18일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은 이희성은 담화문을 통해 “군의 기본 사명은 국토 방위에 있으며...
1980년 5월 31일 신군부 계엄사는 10일 동안 국민을 상대로 살육전을 벌인 이른바 ‘광주 사태의 전모’를 발표하고 민간인 1백 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1백70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1백27명, 군인1백9명, 경찰 1백 44명...
‘광주 사태의 전모’를 발표한 바로 그날(5월 31일)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발족시켰다. 국보위는 ‘사회 정화’라는 명분으로 무소불위의 권한 행사에 들어갔다. 정당활동을 봉쇄하고 언론을 주구로 만드는가 하면 민주화운동 조직을...
국보위는 민심을 얻기 위해 마구잡이식 ‘사회 정화’공작을 벌여 나갔다. 1980년 6월 18일 계엄사는 3·4공화국의 인물들 가운데 공화당 총재 김종필 등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 10명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계엄사는 5월 17일 이들이...
신군부의 국보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사회적 긴장을 지속시킴으로써 사회 전체를 공포 분위기로 압박해 순치시키는 효과를 노렸다. 그 주체도 이제 국보위에서 상임위로 바꾸었다. 상임위는 8월 4일 ‘사회악 일소를 위한 특별조치’를 단행한다고...
국보위의 ‘홍보대’를 자임한 언론들은 ‘전두환 영웅 만들기’에 나섰다. 동아일보 역시 국보위 상임위원장인 그를 띄우는데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1980년 8월 8일자 1면 머리에 <미, 전두환장군지지 / 숙정으로 한국민 환영받아>라는 주먹만한...
1980년 8월 15일 광복절 35주년이었다. 대통령은 최규하는 그날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복절 35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경축사를 했다. 그리고 하루만인 16일 ‘대통령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앞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8월...
전두환은 이미 대통령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4성 장군에서 퇴역해야 했고 언론들은 그의 전역식 또한 ‘극진하게’보도했다. 동아일보는 8월 23일에 열린 전두환의 전역식을 1, 2, 3, 7면에 내보냈다. 내용은...
이미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은 8월 25일 대통령후보로 등록하고, 27일 단일후보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날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 7차 회의에서 전국 재적의원 2천5백40명 중...
1981년 들어 전두환의 ‘제5공화국 창건’은 민주정의당(민정당)의 창당과 대통령후보 지명으로 시작됐다. 민정당은 1월 15일 창당 및 대통령후보로 전출했다. 동아일보는 그 기사를 1월 15일자 1면 머리에 올리고 3면에는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
대내적 절차가 착착 진행되는 가운데 1981년 1월 22일 전두환과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회담이 서울과 워싱턴에서 동시에 발표됐다. 1980년 12월부터 한미 간에 전두환의 미국 방문을 두고 줄다리기가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김대중에 대한...
대학가의 민주화운동은 계속됐고 학생들의 저항활동은 전두환 독재정권뿐 아니라 미국에 대해서도 행해졌다. 광주유혈 진압과 전두환 독재정권 지원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겠다는 게 그들의 목적이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의 미국문화원에 대한 방화...
전두환은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이 최기식 등의 구속으로 매듭지어진 후인 1982년 4월 10일 느닷없이 ‘의식개혁 운동’이라는 구호를 들고 나섰다. ‘나를 포함한 모든 공직자와 지도층’을 대상으로 ‘뼈를 깎는 고통을 각오하는 솔선을’ 다짐하는...
동아일보는 이어 5공 출범 2년을 기리는 시리즈를 통해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속적 지지를 표현했다. <5공화국의 2년>이라는 제목으로 2회에 걸쳐 5공 정부의 각 분야별 평가를 긍정적인 치적 위주로 소개하는 홍보기사였다. 동아일보는 2월...
1983년에 최대의 관심을 모은 사건 중 하나는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었다. 그해 11월 14일까지 총 4백 53시간 45분 동안 방송되는 기록을 남겼다. 모두 10만9백52건의 신청이 접수돼 1만1백80만명의 이산가족이 상봉했다. 한국방송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