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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전복 선동' '명동 사건' 등으로 3·1민주구국선언 폄하한 조선일보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지 9일 만인 1975년 5월 22일, 서울대 학생들이 농대생 김상진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었다. 집회에 합류한 학생 1천여명 가운데 5백여 명은 어깨동무를 하고 교문 밖으로 나갔으나 경찰기동대에 의해 해산당했다. 서울대생 3백여 명이 연행되고 56명이 구속된 '오둘둘(5·22)사건'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이래 단일 대학에서 가장 많은 학생이 구속된 반유신투쟁으로 기록됐다.


오둘둘 사건 이후 학생운동권은 극도의 침체 상태에 빠졌다. 그런 상태로 1975년이 저물고 1976년 봄이왔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 1일 저녁 서울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미사'가 열렸다. 전국에서 올라온 20여 명의 가톨릭 사제들이 공동 집전하고 신·구교 관계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제1부는 김승훈 신부가 유신헌법의 억압성, 사회기강 문란, 심각한 경제 문제 등 한국 사회가 당면한 제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 제2부에서는 문동환 목사가 설교했고 문정현 신부가 김지하 시인 구명을 호소하는 어머니의 편지를 낭독했다. 이후 서울여대 이우정 교수가 <민주구국선언서>를 낭독했으며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윤반웅,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 등 공동명의로 발표했다.

우리의 비원인 민족통일을 향해서 국내외로 민주세력을 키우고 규합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전진해야 할 이 마당에 이 나라는 1인독재 아래 인권은 유린되고 자유는 박탈당하고 있다. 이리하여 이 민족은 목적 의식과 방향감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고 총파국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우리는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여야의 정치적 전략이나 이해를 넘어 이 나라의 앞날을 내다보면서 <민주구국선언>을 선포하는 바이다.

민주구국선언은 유신독재체제의 핵심부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그야말로 긴급조치 시대의 암흑을 깨뜨리는 횃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3월 1일 자정 무렵 이우정, 이튿날 문동환과 윤반웅, 3일 이문영, 안병무, 서남동 등 선언에 서명한 재야인사들이 차례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언론은 이러한 사실 또한 보도하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3월 11일이 되어서야 7면에 3단 기사 <일부 재야인사 정부 전복 선동>을 내보냈다. '민주구국선언'을 '정부 전복 선동'으로 발표한 검찰을 그대로 받아 쓴 기사였다.

조선일보 <일부 재야인사 정부 전복 선동>(1976.3.11.)
...이들 일부 재야인사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반정부인사들을 규합하여 (중략) 종교행사를 빙자하여 수시로 회합 모의하면서 '긴급조치 철폐' '정권의 퇴진 요구' 등 불법적 구호를 내세워 정부 전복을 선동하였다. (중략) 그러나 현 시점에 있어서 국가안전보장의 중요성을 인식한 대다수 국민이 이들의 불법적 선동에 현혹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국민으로부터 아무런 지지를 받을 수 없게 될 것임이 명백해지자 이들은 초조해진 나머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 김대중, 문익환, 함세웅 등이 주동이 되어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등의 동조를 받아 춘계를 기하여 민중선동에 의한 국가변란을 획책하였던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런 검찰의 주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통단사설 <한국민의 생각·1976>을 3월 14일 2면에 내보냈다.

적과 싸우는 나라에서 고고하기 짝이 없는 진리와 민주주의만 내세워 그토록 극성스럽게 세속의 현실정치를 몰아친 결과는 민심의 혼란을 일으켜 국민 사기를 떨어뜨리고 일체감과 국제적 신뢰를 잃게 함으로써 나라와 민주주의와 종교를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 사설은 인간의 희생정신과 민주화운동 정신을 대상으로 폭언을 했다. 조선일보의 발행인부터 논설위원, 평기자에 이르기까지 긴급조치 9호에 묶여 박정희 독재에 대해 바른 소리를 한마디도 못하던 시기에 '민주구국선언' 참여자들이 민족공동체를 위해 과감하게 일어섰다는 사실을 조롱해서는 안 됐다.


검찰이 '정부 전복 선동'이라 격하하자 신민당과 재야세력은 '3·1 민주구국선언'을 '3·1사건'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무총리 최규하는 3월 16일 국회 본회의에 참석해서 "명동성당 사건은 종교의식의 기회를 이용하여 법에 금지된 사항이 나타난 것이며, 선언문 내용엔 정치적 이야기가 들어있고 긴급조치 9호 위반이 분명하다"고 답변했다. 그 이후 언론에서는 '3·1사건' 표현이 사라지고 '명동사건'이라는 용어가 활개쳤다.

조선일보 <명동 사건 3회 공판>(1976.5.30.)
조선일보 <명동사건 18명 5년~집유 선고>(1976.12.30)

















조선일보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대한 공판 과정을 보도하며 '명동 사건'이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이 기사들은 피고인들의 진술과 변호인의 변론을 거의 전달하지 않았으며, 전직 대통령 윤보선과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에게 '무직'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1977년 3월 22일 대법원은 모든 피고인들의 유죄를 인정했다. 고령인 윤보선, 함석헌 등에 대하여는 형 집행을 정지했다. 문익환, 김대중, 문동환 등 9명은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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