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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본부'의 발표문을 받아쓰기 하는 동아일보

10월 16일 오전 10시경 부산대에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독재 타도”를 외치던 학생 2천여 명은 정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오후 2시경 부영극장 앞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자 경찰기동대가 그들의 머리 위로 최루탄을 쏘아대며 방망이로 구타했다. 부산 학생들과 시민들은 이튿날인 10월 17일에도 전날보다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18일 새벽 1시 30분까지 계속된 시위로 파출소 21곳이 불에 타거나 파손되는가 하면 경찰차랑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다. 이틀 동안의 시위에서 군중이 가장 많이 외친 구호는 “유신 철폐”“독재 타도”“언론 자유”“김영삼 총재 제명 철회”였다.


부산 항쟁에 관해 단 한 줄의 기사도 쓰지 않던 언론은 10월 18일에야 비로소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것도 비상계엄 선포가 먼저이고 시위는 부수적이었다.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 제목만 보아도 그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부산에 비상계엄 / 대학생들 소란으로 18일 0시 가해 / 불순분자 경거망동 발본 / 박 대통령 담화 / 부산 사태 기본질서 위협>

동아일보<부산에 비상계엄>(1979.10.13)

나중에 ‘부산 항쟁’이라고 불리게 된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기사는 정작 1면 중간에 5단 기사로 나와 있었다. 치안본부의 발표문을 그대로 옮긴 기사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동아일보<부산 동아대생 3천 여명 16.17 연이틀 도심서 시위>(1979.10.13)
지난 16일 부산대학과 동아대학 학생 3천여 명이 교내에서 정권 타도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제지로 오후 5시경 해산되었다가 부산시내 중심지 번화가 일원에 다시 집결, 2백~5백 명씩 6개 방면으로 진출해 해산을 종용하는 경찰과 대치하던 중 날이 어두워진 것을 틈타 합세한 일부 불순분자들과 경찰관서에 투석, 경찰차량을 불태우고 도청, 세무서와 방송국, 신문사 등에 침입했다는 것이다.

부산지국에 적지 않은 기자들을 두고 있던 동아일보가 직첩 취재를 지시하지 않고 사건이 터진 지 이틀이 지나 치안본부의 발표문을 그대로 보도한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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