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미방 사건'을 '극좌파 반미 테러'로 규정한 조선일보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운동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이른바 '녹화사업'과 대학생들에 대한 감시·연행·고문 등이 끊이지 않았고 반공을 정권안보에 이용하기 위해 간첩단 사건 조작도 자행했다. 그런데도 광주 항쟁 진압 과정에서 드러난 계엄군 만행에 대한 저항은 이어졌다. 특히 대학의 저항활동은 전두환 독재정권과 미국을 향했다. 광주 유혈 진압 묵인과 전두환 독재 정권 지원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물은 것이다.


1982년 3월 18일 부산의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부미방 사건'은 이런 맥락에서 벌어졌다. 먼저 1980년 12월 9일 광주에서 방화 사건이 있었다. 광주 청년들은 계엄군과 미국에 책임을 묻기 위해 미군문화원을 방화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의 쟁점화를 피하기 위해 보도를 완전히 통제했다. 그러다 부산고려신학대학에 다니던 문부식은 도피생활을 하던 김현장을 만나 광주 학살의 진상을 제대로 알게 됐고 동문인 김은숙, 이미옥, 유승열, 김지희, 최인순, 박원식, 최충언 등과 함께 1982년 3월 18일 '부미방 사건'을 일으켰다.


조선일보는 3월 19일자 11면 머리기사에 <'불온분자' 방화로 수사>를 올리고 불타는 건물 사진을 함께 실었다.

조선일보 <'불온분자' 방화로 수사>(1982.3.19.)
경찰 소식통들은 이 삐라의 내용이 반정부적으로 좌경색이 짙은 것으로 보아 지하에서 암약 중인 반정부 활동분자가 대남간첩들이 한미관계를 이간시키려는 목적에서 계획적으로 주한 미 단체 건물을 골라 방화한 혐의가 짙다고 보고 있다.

조선일보는 당시 범인이 밝혀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반정부 활동분자가 대남간첩들이 한미관계를 이간시키려는 목적에서 계획적으로 주한 미 단체 건물을 골라 방화한 혐의가 짙다"고 보도했다.


여전히 범인이 드러나지 않은 3월 21일에도 이런 보도 행태는 이어졌다.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범인들이 "한미 간의 이간을 노렸을 것"이라며 이 사건은 '민족적 수치'라고 주장했다.

조선일보 사설 <누구를 위한 방화인가>(1982.3.21.)
...사상자가 날 것을 무릅쓴 방화범들의 테러 목적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사회불안을 조성하고 한미 간의 이간을 노렸을 것이다. 방화 사건 직전에 부산 시내 요소에서 뿌려진 불온삐라도 이들 일당의 짓일 것으로 수사기관은 보고 있다. 북괴의 상투적인 주장과 궤를 같이하는 반정부, 반미적인 불순한 구호로 가득 찬 내용인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는 "세계적 돌림병인 신좌익적 폭력화로 변모하는 새로운 양상에 우리는 엄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며 부미방 사건의 동기를 단순히 '한미간 이간' '반정부' '반미'로 폄하했다. 광주 유혈 진압과 미국의 책임을 묻는다는 원래 동기는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부미방 사건을 거의 매일 주요기사로 다뤘다. 대대적 보도를 통해 '빨갱이 테러리스트'의 반미 테러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4월 2일부터 <지하대학>이라는 제목으로 대학생들의 '지하 이념서클 의식화 운동' 실태에 관한 시리즈를 시작했다. 이후에도 사설과 칼럼들은 통해 부미방 관련자들을 '극좌적 광신파' '유례없는 저수준' '지능적으로 미숙한 젊은이' 등으로 표현했다.

조선일보 <지하대학>(198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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