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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쿠데타 3일만에 '혁명' 찬양한 조선일보


1961.5.16 쿠데타 당일 '쿠데타'라 보도한 조선일보

1961년 5월 16일 0시 15분경 육군소장 박정희 일파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장교 250명, 사병 3500명이 동원된 대대적 군사 반란이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5.16 군사 쿠데타는 명백히 헌법 위반으로서 주동자들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총선으로 구성된 국회가 선출한 국무총리 장면이 책임지는 합법 정부를 군사력으로 전복했기 때문이다. 주동자들은 실정법을 무시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공공기관과 방송국을 불법으로 점거했다.

쿠데타가 발생한 5월 16일 조선일보는 호외를 발행했는데, 당일에는 '군부 쿠데타'로 명명하여 '반공혁명'이라 보도한 동아일보보다 사실 보도에 가까웠다. 그러나 곧바로 이틀만인 5월 18일자 조간부터 조선일보 지면에서 '쿠데타'라는 용어가 사라졌고 19일자 조간부터 '군사혁명'을 노골적으로 찬양, 미화하는 사설들이 쏟아졌다.


'5.16쿠데타'를 찬양하기 시작한 조선일보의 1961.5.19. 사설

61년 5월 19일 조선일보 사설 <제2단계로 진입한 혁명과업 완수를 위하여>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우리는 제1단계로서의 정권 장악이 군부에 의하여 무혈 평온리에 행하여진 것은 비단 혁명 주체세력인 군부를 위하여서 다행한 일일뿐 아니라 잠시 동안이나마 질서와 체제가 바뀌는 과도기를 당하여 지향할 바를 몰라 방황할 뻔하였던 대다수 국민에게도 극히 축복스러운 일이었다. ...(중략)... 이번 혁명이 반공과 더불어 "미국을 위시한 자유국가 간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을 선명한 당연한 논리적인 귀결로서 요청되었던 민주적인 절차 이행을 완성시킴으로써 혁명의 법통이 완성된 데 있는 것이다.

바로 아래 사설 <혁명의 공약과 국내외의 기대> 역시 '혁명에 바치는 찬사'에 다름 없다.


군사혁명이 완전히 성공함에 즈음하여 우리는 세 가지 점에서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첫째는 군사혁명이 무혈혁명의 전격적이었다는 것이요, 둘째로는 군사혁명위원회가 발표한 혁명공약에서 발견할 수 있고 셋째로는 국내외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일보가 군사혁명을 미화하거나 혁명 과업을 찬양한 사설은 꼬리를 물고 나왔다.


<혁명 내각의 발족과 우리의 기대>(5/21)

<정당 사회단체 해체는 발전적 해소이기를 바란다>(5/23)

<포고 11호가 의도하는 언론 창달>(5/25)

<국제적으로 공고해진 혁명 정부의 위치>(5/27)


<혁명내각의 발족과 우리의 기대>(1961.5.21)

<정당 사회단체 해체는 발전적 해소이기를 바란다>(1961.5.23)

<포고 제11호가 의도하는 언론 창달>(1961.5.25.)

<국제적으로 공고해진 혁명 정부의 위치>(196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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