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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단지 2만여 주민 난동>(1971.8.11.)

서울시는 개발 붐을 일으키려 광주대단지가 '신천지'가 될 것처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투기자본이 몰려들어 분양증을 사들이려고 경쟁을 벌였다. 대단지에 남은 나머지 3분의 2 가량의 사람들은 언저리 싼 땅을 사서 판잣집을 지어야 했다. 서울 판자촌이 광주단지로 옮겨진 셈이다. 투기자본이 빠져나가자 땅값은 폭락했다. 개발비용 환수가 어렵다고 판단한 서울시는 1971년 7월 택지를 강제 매각하려고 했다. 그 무렵인 8월 10일 오전 11시경,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서 '철거 이주민들'이 대대적 투쟁에 나섰다.

조선일보 7면 기사 <광주단지 2만여주민 난동>(1971.8.11)

다음날인 8월 11일자 7면 머리에 조선일보는 <광주단지 2만여 주민 난동>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려 이렇게 전했다.

10일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광주대단지 주민 약 2만명이 분양지 무상불하를 요구하며 출장소 건물과 관용차, 경찰 백차 등을 불 지르는 등 약 6시간동안 무법천지를 방불케 하는 난동을 벌였다. (...) 이때 양 시장이 도착, 대표를 만나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고 설득했으나 군중은 걷잡을 수 없게 흥분되어 있었다.

광주로 이주하면 살 곳을 마련해주겠다는 서울시 말만 믿고 광주로 온 철거민들은 24인용 천막 하나에서 네댓 가구가 생활해야 했다. 상하수도나 전기시설이 없었으며, 수천 가구에 공동화장실이 12개에 불과해서 인근 야산은 순식간에 인분으로 뒤덮였다. 이질, 설사, 콜레라 등 전염병이 창궐했다. 초여름에는 하루에 3~4구 시신이 실려 나오기도 했다. 사태가 이렇게 심각해질 때까지 조선일보를 포함한 거의 모든 신문이 이런 비극이 박정희 정권의 무모하고 비인간적인 개발정책의 결과라는 것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조선일보 2면 사설 <광주단지 사태의 교훈>(1971.8.12)
...관공서와 치안차량들을 탈취, 방화를 한다는 행위가 어찌 그렇게도 치안능력을 과시하는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만 것인가. 평소 이 사회의 밑바닥 계층의 심리에 무엇인가가 잠재해 있었던 것이 분명한 일이다. 그것을 소외감, 또는 좌절감, 아니면 이질감이라고 해도 좋다.

도시빈민들이 '불도저식 개발'에 희생되어 생사의 갈림길에서 일으킨 저항이 폭력에 기댄 것은 비판받을 소지가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참상을 따뜻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참된 언론이 할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8월 12일자 2면 사설 <광주단지 사태의 교훈 -이질감의 불식에 위정의 눈을 돌려라>에서 이 사건의 원인을 '소외감' '좌절감' '이질감'이라고 표현했다. 당장 내일 먹을거리도 마땅한 거처도 없는 사람들이 단순히 그런 심리적 동인 때문에 행정당국을 상대로 극한적 항의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고 보는 것은 책상 앞 지식인들의 단순한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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