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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되는 박정희의 철권통치, 머리 조아린 조선일보

70년대 초 사법 파동과 광주대단지 사건 등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가 고조되자 대학가에서 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졌다. 1971년 9월부터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 등 대학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당면 요구는 학원에 침투한 교련 담당 현역 군인이 학교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수도경비사 현병대 군인들이 10월 5일, 고려대에 난입해 농성 중인 학생들을 불법 납치하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다. 무장 군인의 학교 난입 자체가 충격인데, 학생들을 납치했으니 천인공노할 민주주의 유린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10월 5일부터 7일까지 지면에 단 한 건의 기사도 싣지 않았다. 3일이 지난 8일에서야 관련 기사를 낸 조선일보는 10월 10일, <군기와 유 국방의 책무>라는 사설로 입장을 밝혔다.


조선일보 사설 <군기와 유 국방의 책무>(1971.10.10.)
(국방부장관이) 솔직히 사실 그대로를 설명하고 잘못했다는 것을 시인했으므로 이 충격적인 사건이 공개되지 않은 채 쑥덕공론으로 시민들의 입과 귀를 통해 꼬리를 붙여 퍼져 나가던 5일 아침부터 며칠간의 불안했던 민심을 가라앉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다행...(중략)...

군의 학생 납치라는 충격적 사건이 공개되지 않은 것에는 보도를 하지 않았던 조선일보의 책임도 컸으나 조선일보는 마치 다른 나라 이야기 하듯 '다행'이라며 안도를 표했다. 무장군인이 학교에 난입해 학생을 납치했는데도 국방부장관이 잘못을 시인했으니 됐다는 태도다.


여론의 반발이 커졌으나 박정희 정권은 더욱 강압적 태도로 학생들을 진압했고 박정희는 국회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10월 12일, 학생들의 강제 징집을 포함한 특별명령을 내렸다. 이어서 10월 15일에는 사실상 계엄령이나 다름 없는 위수령을 발동했다. 10월 23일 위수군이 학원에서 철수할 때까지 전국 23개 대학에서 학생 174명이 제적되고 1만 명 이상이 병무청에 신고됐다. 독재에 저항하는 학생들을 말그대로 군화로 탄압한 것이다.

12월 6일에는 느닷없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에 조선일보는 적극 지지하는 사설을 냈다.


조선일보 사설 <국가비상사태의 선언 국민의 정신적 총무장으로 난국을 극복해내자>(1971.12.7.)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흐름을 악용하는 북괴가 전쟁 준비에 광분하고 있다는 냉엄한 현실...(중략)...정보기관의 세밀한 분석과 군사당국의 철저한 검토 끝에 이뤄진 것(국가비상사태)...(중략)...(국가비상사태 선언)은 박 대통령의 대호령...국민총력전으로서의 국민 총화가 대북괴 대비의 기초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중략)... 우리는 참으로 엄숙하게 이 난국을 극복할 마음의 자세를 전체 국민과 더불어 심각하게 자성해 보아야 할 순간

당시 국제정세가 대화해(데탕트) 시기였고 베트남전도 마무리 단계였음에도 박정희는 민주주의 탄압의 의도를 숨기기 위해 '북괴'와 '국제정세'를 핑계로 댔다. 조선일보는 이를 칭송하면서 '박정희의 대호령' '국민 총력전' '국민 총화' 등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제국주의에 바쳤던 헌사들을 총동원했다. 심지어 국민 전체가 자성해야 한다며 오히려 책임을 국민에 돌렸다. 독재 권력에 굴종하는 조선일보의 본능이 잘 드러난 사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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