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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의 생일에 바친 '용비어천가'

1939년에 접어들자 일제는 국민생활 전반을 통제하는 ‘전시체제’를 더 강화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1월 1일자 1면 머리에 실린 ‘천황’의 새해 동정에 그런 경향이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1938년 1월 1일자에도 그랬듯이 동아일보는 ‘천황’과 ‘황후’의 사진을 큼지막하게 싣고 <대원수 폐하 어일상 어홍업 완수에 숙야어정려>라는 제목을 달았다.

동아일보<대원수폐하어일상 어홍업완성에 숙야어정려>(1939.1.1 )
어능위의 어휘, 전첩의 영광 찬연히 어경사로웁신 소화제14춘, 황공하옵시게도 신엄 극한 금리에 대본영을 치하옵시어 제2회의 가춘을 영하옵신 대원수 폐하께옵서는 성수 어삼십구를 산하옵신다. 황후 폐하께옵서는 어년 어삼십칠세의 춘을 영하옵시어 어경사는 양춘 3월경이옵시라는데 익익 어건하옵시고 우대궁어소에 계옵신 황태후 폐하께옵서는 어년 어오십육세의 신춘을 영하옵셨다(생략)

동아일보는 이 기사에서 일본 ‘천황’과 조상들을 노골적으로 신격화하고 있다. ‘신엄’‘신성공명’‘신의’‘신역’같은 말들이 바로 그 증거다.


위의 기사를 통해 명확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천황’이 궁중의 은밀한 곳에 ‘대본영’을 차려 놓고 ‘대원수’로서 중국침략전쟁을 총지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한 뒤에 미국의 일본 보호 정책에 힘입어 ‘최고 전범’으로 처단당하는 것을 벗어났다.


동아일보는 ‘천황의 새해 동정’에 관한 기사만으로는 미흡하다고 여겼는지 바로 옆에 <근 봉하 신춘>이라는 ‘용비어천가’를 실었다.

동아일보<근봉하신춘>(1939.1.1 )
천황 폐하께옵서는 어정무 어군무에 어정려하옵시고 계신 중에 지나사변발발 이래 어다망하옵신 어일상으로 계신 것을 배문하고 우리 국민은 오직 홍대한 성은에 감격할 뿐이다(중략)천황폐하, 황후 폐하, 황태후 폐하의 성수 무강하옵시고(중략)제국 정부의 기정 방침인 대륙의 장기건설의 목적을 수행함에는 국민의 각오와 협력이 크게 요구되는 바이니 우리 국민들은 일단 시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각오와 분발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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