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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신 학원 투쟁 축소 보도한 조선일보


조선일보 <서울대생 23명 구속>(1973.10.9.)



1971년의 위수령 및 군대의 학원 난입, 대거 강제 징집으로 학원가의 저항이 당분간 잠잠했으나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기로 1973년 8월부터 다시 학생들의 반유신 투쟁이 시작됐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학생들이 기습적으로 선언문을 발표해 파쇼 통치 중단, 중앙정보부 해체, 기성 정치인 및 언론인의 각성을 요구했다. 곧바로 경찰이 출동해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연행했다. 그러자 학생들의 저항에는 더욱 불이 붙어 구속자가 더 늘었다. 당시 언론은 춤묵하다가 동아일보 젊은 기자들의 강력한 반발호 10월 8일 첫 보도가 동아일보에서 나갔다. 그러자 조선일보도 10월 9일, 기사를 냈는데 겨우 1단짜리 단신이었다. 그나마도 학생들의 요구 중 유신독재를 규탄한 내용은 모두 빼버렸다.






학생들의 요구는 1단짜리 단신에 그쳤지만 정부의 목소리는 크게 전달됐다. 조선일보는 10월 10일에는 문교부장관 민관식이 전국 대학생 총장, 학장들에게 보낸 공한을 7단으로 크게 실었다.


조선일보 <서울대생 데모는 반정부적>(1973.10.10.)

이 기사는 문교부장관의 공한 내용을 앵무새처럼 받아쓸 뿐 서울대 3개 단과대학 학생들이 저지른 반정부적 집단행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북한 공산집단이 내세우고 있는 허무맹랑한 구호에 영합하는 등의 반국가적 처사"가 뭔지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어째서 투쟁하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 투쟁을 탄압하는 정권의 입장만 옮기기 바쁜 것이다.


조선일보의 이러한 침묵과 편파성에도 학생들의 반유신 투쟁은 전국으로 번졌다. 조선일보는 전국 대학가로 퍼진 반유신 투쟁을 10월 12일부터 12월 8일까지 줄곧 사회면 7면 왼쪽의 네 칸짜리 시사만화 옆이나 그 아래에, 마치 닭장 속의 병아리처럼 가둬놓았다. 반면 박정희 정권의 입장은 중요 기사로 다뤘다.


사설도 하나 내지 않으며 철저히 정권에 굴종한 조선일보는 12월 7일, 박정희가 구속학생 전원 석방을 발표하자 그제서야 사설을 냈다. 조선일보 사설 <학원의 정상화, 학생 처벌의 백지화를 보고>(1973.12.8.)는 박정희에 조치를 "따스한 훈기", "희망"으로 극찬했다. 당시 젊은 학생들은 투옥과 제적을 감수해야 했고 10월부터 2달 넘게 이어진 저항의 불씨는 조기방학, 휴강 등 강제조치로 겨우 잠잠해졌는데 이를 두고 조선일보는 희망을 운운한 것이다. 사설 곳곳에는 박정희를 명의로 보는 대목도 있다. 물론 조선일보가 기대한 희망의 빛은 반유신투쟁을 이어간 시민들에 의해 꺼지고 말았다.






조선일보 사설 <학원의 정상화>(1973.12.8.)

"추위와 어려움을 몰아내는 어떤 따스한 훈기가 간절히 바라지고 이 난국을 타개하는 가슴 트이는 조처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었는데 점차 그 희망의 빛이 보이는 느낌이 든다. 그 첫째가 개각을 계기로 한 서정쇄신의 다짐이며, 둘째가 오늘에 본 구속 학생의 구제 조치이다. ...(중략)...이러한 정부의 방침은 ...(중략)...근원적으로 사태의 악순환을 막아보려는 정책 방향의 제시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환부에 대한 치료는 빠르면 빠를수록 쾌유가 이른 법이고 발병에 앞서 예방보다 더 좋은 건강의 비결은 없는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1973.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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