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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미총독'과 '천황폐하'를 찬양하는 동아일보

동앙일보 1937년 11월 2일자 3면에는 <남총독 금강산 답파기 / 비로봉산에선 원기와 기백>라는 장문의 기사가 실렸다.

동아일보<남총독금강산 답파기.비로봉상에선 원기와 기백>(1937.11.2)
한풍이 심한 때의 금강산 탐승은 남(미나미)총독에게 상응한 금회의 여행이었다(중략)누가 60여 세의 노구라고 생각하리오. 총독의 원기와 용의한 가에는 생각도 듣지 않고 전 코스 중 승가한 것은 아마도 2, 3 킬로미터에 불과할 것이다(중략)제2일은 강우 중에도 군복으로 태연히 구성동 만물상의 험난을 답파한 그 기백이 전 금강을 압도 한 것이다. 총독의 신념 중에는 무슨 암시를 주는 박력이 몸에 감할 뿐이다. 무엇이나 솔선하여 실천궁행, 견인불발의 범을 시하는 것으로 차 기백이전 반도민중의 신과 심에 젖어들 실질강건의 정신인 것이다.

미나미 지로는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총책임자로서, 우리민족에게는 억압과 수탈의 ‘원흉’이었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그를 고매한 인격자로 묘사하면서 ‘실천궁행, 견인불발’의 모범을 보이는 한편 ‘실질강건의 정신’을 지니 위대한 지도자라고 찬양하고 있다.


미나미는 동아일보 기사가 전하듯이 단순히 금강산 관광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금강산에 매장된 군수품 원료인 마그네사이트 개발을 목표로 답사에 나선 것이다. 당시 그 정보를 들은 일보느의 재벌 미쓰비시, 미쓰이 등은 총독부의 힘을 빌려 마그네사이트를 발굴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천하의 명승’인 금강산은 무참하게 파괴될 것이 분명했다.


1938년 1월 1일자 동아일보 1면은 ‘천황 히로히토’가 새해를 맞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알리는 기사로 요란하게 치장되었다. 봉황 두 마리가 에워싼 ‘천황 폐하’와 ‘황후 폐하’의 사진이 무려 5단으로 실린 그 기사의 제목은 <대본영 하에 어월년 / 황공…천황 폐하 어일상>이다.

동아일보< 대본영하에 어월년 황공 천황 폐하 어일상>(1938.1.1)
작전계획을 짜는 중에 기념할 소화 13년을 맞은 대원수(천황)는 나이가 38세가 된다. 지나사변 이래 날이 밝기 전에 옷을 입고 해가 진 뒤에 저녁밥을 먹을 정도로 정성을 다하는 일상에도 몸은 더욱 강건하여 측근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다(중략)이번 겨울에도 추위를 피하러 가지 않고 00 의식에 즈음하여 옷을 갈아입는 것 말고는 시종일관 군복으로 장병의 노고를 걱정한다고 한다.

위의 글은 일본군이 중국에서 노교구사건을 일으킨 뒤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한 이래 ‘천황’이라는 사람이 ‘대원수’로서 ‘노심초사’전선의 장병들 걱정 때문에 무더위를 피하는 일조차 삼가며 언제나 군복을 입고 지낸다는 사실을 마치 ‘황공무지’한 중대사건인 듯이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전시라서 궁중의 중요한 행사들을 제대로 치르지 않고, 장병들에게 자신의 문야잉 새겨진 담배를 하사하는가 하면 상이군인들에게 신경쓰는 일까지도 ‘성은이 망극하다’는 투로 감읍하고 있다.


1938년 새해 초 동아일보에 그런 기사가 나올 무렵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천황’을 ‘살아 있는 신(현인신)’으로 떠받들고 있었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그들보다 한 술 더 떠서 제 나라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의 ‘수괴’를 하늘에 있는 신처럼 모시는 아첨의 글을 예사로 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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