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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사변' 왜곡보도로 '친일보국'하는 동아일보

1938년 7월 7일은 일제가 중국침략전쟁(일본의 용어로는 지나사변)을 일으킨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동아일보는 7월 8일자 1면 머리에 일본 외상 우원의 ‘담화’를 크게 실었다.

동아일보<사변일주년과 각상소회 반일외교를 극복 우원외상담화발표>(1938.7.08)
회고하면 지나사변은 벌써 1주년을 영하게 되었는데 노구교에 발단한 일지사변은 아방이 극력 사태의 불확대에 노력하였음에 불구하고 폭려한 지나 측의 도발에 의하여 드디어 금일과 여한 발전을 보게 된 것이다(중략) 임시 유신 양 정권 및 몽강 정권의 강화 발전에 의하여 전화는 일소되고 치안은 회복되어 착착 부흥되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이 노구교사건이라는 것을 일으켜 중국침략전쟁을 시작했다는 것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사실이었는데 일본외상이라는 자는 “노구교에 발단한 일지사변은 아방이 극력 사태의 불확대에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폭려한 지나 측의 도발에 의하여”전쟁으로 발전했다고 강변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외상의 이런 담화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은 채 원문 그대로 실음으로써 ‘친일보국’의 나팔수 노릇을 충실하게 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일제가 중국에 세운 괴뢰정권들이 장개석의 국민정부를 대신해 ‘명랑 지나’를 건설하고 있다는 외상의 주장도 곧이곧대로 전달했다.


동아일보 1938년 7월 7일자 사설<사변 1주년>은 일제의 중국 침략전쟁에 대해 일본 외상 우언이 발표한 담화 내용보다 훨씬 더 심하게 그 전쟁을 미화하고 찬양했다.

동아일보<사설 사변 1주년>(1938.7.7 )
금 7일은 지나사변이 발발하여 1주년을 맞이하는 날이다. 회고컨대 사변의 발단은 작년 7월 7일 후반에 노구교 반에서의 29군의 항일 발포에 있었다(중략)제국이 장 정권에 향하여 간과를 움직이게 된 근본 목적은 극동의 질서와 평화를 수립함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동양문화를 수호하고 지나의 산업경제를 개발하여 일지 양 국민의 복지를 증진함을 이념하는 바이다(중략) 국민이 국체에 순응하여 장기전선의 난사업을 극복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동아일보는 ‘지나 사변’이 장개석 정권이 도발 때문에 일어났다는 단정에서 출발한 이 사설은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조금도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았을뿐더러 도리어 공산당과 결탁하여 무력저항을 꾀했기 때문에 ‘제국정부’가 ‘응징’에 나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본군이 남경을 함락시킨 뒤 무고한 양민 수십만 명을 학살하자일제의 만행을 막으려고 중국 인민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하다 순국한 사실은 외면한 채 일본군이 ‘극동의 질서와 평화’를 위해 그런 전쟁을 벌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국민정부과 공산당과 ‘좌우합작’을 하면서 초토화작전까지 동원해서 일본군의 침략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고 한 것도 다루지 않았다.


위의 사설은 동아일보가 ‘친일보국’과 ‘황군 찬양’을 위해 문자 그대로 광분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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