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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띄우기'에 열성을 다하는 동아일보

대내적 절차가 착착 진행되는 가운데 1981년 1월 22일 전두환과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회담이 서울과 워싱턴에서 동시에 발표됐다. 1980년 12월부터 한미 간에 전두환의 미국 방문을 두고 줄다리기가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김대중에 대한 감형 등을 조건으로 전두환의 방미가 결국 성사된 것이다.


동아일보는 그것을 국가적 경사인 듯이 대서특필했다. 1월 22일자 1면 머리에 통단기사를 실었다. 3면과 5면에도 관련 기사를 실었다. <레이건과 한미 정상회담>이라는 사설은 레이건이 취임한 후 첫 번째로 전두환을 초청했음을 강조하면서 그의 입지를 강화해주는 등 ‘레이건을 통한 전두환 띄우기’에 열심이었다.

동아일보<레이건과 한미정상회담>(1981.1.22)
레이건 대통령의 전 대통령 초청은 레이건 취임 이후 첫 번째로 취해진 외국원수 초청이라는 점에서 그가 한미관계를 매우 중시하고 동시에 그동안 만만치 않게 얽혀온 현안의 조속한 해결을 서두르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양국 관계 개선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한미 정상회담이 발표된 후 전두환 정권은 1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김대중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이어 비상계엄을 해제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내란음모’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김대중은 죽음을 면하게 됐고 비상계엄은 선포 4백56일 만인 1월 24일 24시를 기해 해제됐다. 동아일보는 1월 24일자 통단사설<‘김대중 사건’단락 / 화합 위한 ‘정치’의 더욱 폭넓은 전개를>을 통해 그 조치가 ‘전두환 대통령의 정치적 배려’임을 재삼 강조했다.

동아일보<김대중사건 단락>(1981.1.24)
정부는 김대중 사건 피고들에 대한 감형에 붙어 “70년대의 구 정치는 작년에 야기된 극도의 사회 혼한과 사북·광주 사태 등의 폭동 등으로 일대 국가적 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사실상 ‘파경’으로 종말을 고했으며 김대중 사건은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하고 “김대중은 70년대 구 정치에서 ‘반체제’였으며 새 시대 정치와는 본질적으로 관계없는 자이며 그 일당의 범죄는 구 정치의 연장선상에서 자행되었다는 점이 새 시대의 개막에 앞서 국가원수에 의해 특별히 관용된 배경”이라고 설명했는데, 그와 꼭 같은 배려로 김대중 사건뿐 아닌 다른 구시대적인 사건들도 하루 빨리 단락을 짓도록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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