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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통치'를 용납할 수 없다며,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주장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동아일보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던 5월 27일자 1면 머리에 <공위와 민족진영>이라는 사설을 올렸다.

동아일보< 공위와 민족진영>(1947.5.27)
이제 민족진영이 공위에 대하여 신탁통치 내용 여하, 민주주의 해석 여하에 의념을 포회하는 것은 켤코 공위의 중대성을 몰각하거나 조선의 세계사적 임무 수행에 등한하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것을 알고 임무에 충실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38선을 철폐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반대할 조선사람이 어디 있으리요만 36년 동안이나 일제의 철쇄에 신음한 만치 자주독립은 이 민족의 지상명령인지라 이제 또다시 5년 동안이나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바이며

이 사설은 ‘자주독립’이 ‘민족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에 “5년 동안이나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용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미국과 영국이 그 결정을 뒤집지 않는 한, ‘한국에 민주적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전제로 5년 동안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은 불변의 원칙이었다. 민족진영의 ‘신탁통치 절대 반대’는 좌익진영이 신탁통치를 찬성한다는 데 대한 입장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긴 안목으로 자주독립과 통일을 이루기 위한 전략으로서는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동아일보가 사설에서 주장한 바와 달리 한민당은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6월 19일 74개 정당·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위원회’를 구성햇다. 한독당의 혁신파와 민주파는 미소공위 참가를 주장하면서 가각 신한 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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