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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 폄하하고 2·12 총선 민의 왜곡한 조선일보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이 창당대회를 열었다. 신민당은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의 연합체인 민주화추진연합회(민추협)을 모체로 했다. 신민당의 창당은 제12대 총선을 대비한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신민당 창당 다음날인 19일, 1면 머리기사에 민정당 전국구 후보자 발표를 실었다. 신민당 창당은 1면 사이드로 밀렸다. 야당다운 야당 출현에는 별로 무게를 두지 않는 듯했다.

조선일보 1면(1985.1.19.)

그런가 하면 며칠 뒤인 1월 22일 사설 <신당과 구당>에서는 신민당을 '또 하나의 야당' 정도로 폄하했다. 야당 간 '선명성' 경쟁을 경계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사설 <신당과 구당>(1985.1.22.)
...실제로, 최근 몇 년 동안 국민들은 야당이라 자처하는 국민당이 민정당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지 잘 알지 못해 했고, 제1야당인 민한당이 과연 얼마나 야당적 의지를 발휘하려 하는지, 분명하게 가늠할 수 없었다. (중략) 그러던 차에 이른바 선명성을 자처하는 신한민주당이 창당됨으로써, 기존의 정계에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 하나의 문제는 있다. 아무리 선명성을 창당 이유로 내세운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여당과의 관계에서 또 하나의 야당이 생겨난 것만은 사실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사설의 논리는 아주 절묘하다. 현행 다당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신민당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니 선명성을 자기만이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민당을 기존 민한당이나 국민당 등 민정당이 패권 유지를 위해 만들고 지원해 온 위성정당과 동일시하는 시각부터가 문제다.


조선일보는 1월 24일자 1면부터 2·12 총선의 부정적 요소를 강조하는 기획기사 <2·12 현장의 눈>을 연재했다. <범람하는 당원용> <단골망령 흑색선전> <단합대회는 만원이다> <치사한 싸움 인신공격> <선거가 군대 항전인가> <정치는 피보다 진한가> 등 연재기사 제목만 봐도 선거 혐오를 일으켰다. 내용 역시 여당에 기울어진 선거판에서 야당을 겨냥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다음은 1월 25일자 1면 <단골 망령 흑색선전>의 일부다.

이런 전화도 있었다. "여당이 추진하는 공명선거 1천만명 서명운동이 가가호호로 이루어져 여당 지지 성명의 성격으로 변모되고 있다" "여당이 입당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들이다. (중략) 선거철의 개막과 함께 이 같은 유의 전화는 하루에도 몇 통씩 신문사로 걸려온다. 호소와 항의, 제보와 요청이 뒤섞이는 경우도 있지만, 침소봉대식의 과장과 편의적인 왜곡, 심지어는 자의에 의한 조작 인상마저 주는 예도 있다.

조선일보가 이렇게 지속적으로 선거의 어두운면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2·12 총선 합동연설회가 본격화하면서 유권자의 관심과 참여는 폭발했다. 2월 8일 미국 망명 중이던 김대중이 귀국하면서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김대중 귀국에 관한 기사를 1면에 2단으로 쓰는 보도지침이 내려졌으며 조선일보 역시 이에 따랐다.


민정당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3인은 묶어두고 나머지 규제대상 정치인들을 단계적으로 정치 규제를 풀어 그들이 한 정당으로 뭉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또 12대 총선 날짜도 앞당겨 새로 출범한 신민당이 선거운동 준비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법정 선거운동 기간도 짧아졌다. 모든 것이 신민당에 불리했다.


그러나 총선 투표 결과, 신민당이 지역구에서 50석을 차지하며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상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민정당의 패권정당 구도가 완전히 붕괴하고 민정·신민 양당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이에 조선일보는 2월 14일에 <평화의 정국을 당부한다>는 사설을 써서 이와 같이 밝혔다.

조선일보 사설 <평화의 정국을 당부한다>(1985.2.14.)
그 대신 민정·신민을 축으로 하고 거기에 민한·국민이 종속변수로 참여하는 새 판도가 짜여졌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아직 민정·신민 사이에 게임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공동인식이 없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에 대해, 정국의 파국 아닌 안정을 바라는 우리의 입장에선 적잖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민정이나 신민이 서로 정치적으로 대립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일이다. (중략) 그 유권자들이 보인 변화에의 지향이라는 것도, 변화는 바라되, 안정을 깨는 격변이 아닌, 평화로운 진화일 것임을 우리는 확신한다.

"파국 아닌 안정"이란 전두환 정권 지지와 같은 맥락이다. 조선일보는 유권자들이 "안정을 깨는 격변"을 원하지 않는다고 썼으나 2·12 총선은 일종의 '선거혁명'이라 할 만하다. 투표율이 84.2%에 달했다. 서울·부산·광주·대전에서 신민당 후보 전원이 당선했다.


3월 6일, 정치활동 피규제자에 대한 전면적인 해금조치가 이뤄졌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신민당 중심의 야권통합을 강조했다. 민한당 간부가 대거 탈당해 신민당에 입당해 신민당은 재적의원 3분의 1이 넘는 103석을 확보했다. 이런 혁신은 대통령 직선제 등 헌법 개정 운동과 함께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가는 발판이자 동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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