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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 항쟁'을 편향적으로 보도한 조선일보

민주화 운동은 노동계에서 크게 일어났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1980년 4월 21일 사북탄광 사건, 곧 '사북항쟁'이 발생했다. 탄광촌 광원들의 어용노조 반대와 임금 인상 시위 투쟁이 그 발단이었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 국내 최대 민영탄광인 동원탄좌 사북영업소가 있었고 그곳에서 일하던 3천5백여 명의 광원들이 경찰과 충돌하며 폭력사태가 터진 것이다. 치안 공백 상태가 계속되다 24일 광원 대표와 정부 측이 협상을 마무리하고 합의에 이르렀다.


문제는 언론의 보도 태도 였다. 계엄사가 24일부터 보도를 허용하자 언론은 사북 사건의 폭력 양상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언론은 사북 항쟁을 '무법천지'로 묘사했고 노동자들의 과격성을 과장했다. 결과만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행위를 폭동 혹은 난동으로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24일자 1면 머리기사에 <광부 3천5백명 유혈 난동>이라는 큰 제목을 붙이고 임시취재반 이름으로 보도했다.

<광부 3천5백명 유혈 난동>(1980.4.24.)
노조지부장의 배신을 규탄하는 광부들이 경찰과 충돌하면서 폭도화, 광산촌을 완전히 점거하는 사태로 번졌다.(중략) 읍 전체를 완전히 점거하고 읍으로 들어가는 통로에 바리케이드를 친 채 24일 새벽까지 4일째 사북읍을 무법지대로 만들고 있다.

같은 날짜 7면 머리기사에서도 '광부 폭동 현장'을 부각시켜 보도했다.

조선일보<무법이 휩쓴 공포의 탄광촌>(1980.4.24.)
평화로웠던 광산촌이 광부들의 난동으로 하루아침에 공포의 거리로 변했다. 연 4일째 폭도로 변한 광부들에 의해 점거된 사북읍은 상가가 철시하고, 주민들이 문을 걸어 잠근 가운데 술 냄새를 풍기며 각목과 쇠파이프를 든 광부들만이 오가는 죽음의 거리였다.

조선일보는 이와 같이 '사북 항쟁'을 광원들의 생존권 투쟁이 아닌 폭동 사태로 보도하고, 현장을 '죽음의 거리'로 그렸다. 사진 역시 '폭동 현장'을 부각시키며 병원에 입원 중인 경찰관들의 대비적인 사진을 함께 실었다. 일방적이고 편향적인 보도로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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