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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마산 항쟁 폄훼한 조선일보 보도

1979년 10월 16일 오전 10시경 부산대에서 시위가 시작됐다. "독재 타도"를 외치던 학생 2천여 명은 정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세갈래로 나뉜 학생들은 공방전을 펼치며 시내로 나섰다. 오후 2시경 부영극장 앞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자 경찰기동대가 그들 머리 위로 최루탄을 쏘아대며 방망이로 구타했다. 시위는 중심가 전역으로 번져 오후 7시경 도심 대로는 시위 인파로 가득 찼다. 부산 민중항쟁이 시작됐지만 전국의 모든 언론이 입을 다물었다.


10월 18일, 언론은 비로소 기사를 내보냈다.

조선일보 <부산에 비상계엄>, <부산번화가서 밤중 난동>(1979.10.18)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 제목은 <부산에 비상계엄 선포>, <부산번화가서 밤중 난동>이었다. 비상계엄 선포가 먼저이고 시위는 부수적이었다. 조선일보는 4월 혁명, 광주 민중항쟁과 더불어 1948년 건국 이래 최대의 기념비적 사건인 부산 항쟁을 '난동'이라고 보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발동됐지만 그로부터 15시간도 지나지 않은 오후 2시경 마산 경남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학생 1천여 명이 "유신헌법 철폐하라" "군사독재 타도하자"등 구호를 외치며 교내 시위를 시작했다. 오후 5시경에는 마산시내 '3·15 의거탑' 주위와 문화방송국 주위에 학생과 시민이 모여 큰길을 완전히 메우고 유신독재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쳤다. 20일 정오 마산시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됐다.

조선일보 <폭동에 가까운 방화·파괴 이틀>(1979.10.20.)

조선일보는 이번에도 부산 항쟁 경우처럼 공권력이 발표한 내용 위주의 기사를 내보냈다. 1면 기사 <폭동에 가까운 방화·파괴 이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창림 마산경찰서장은...(중략)..."지난 18일과 19일 양일간 일부 학생과 불순분자들이 합세해서 소요를 일으키고 공공건물을 방화 파괴하고, 공용장비를 파괴하고 상가점포를 파괴하는 등 난동을 일으킨 바 있다. 이번 시위의 특징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폭동에 가까운 시위였고 (중략) 이번 소요 배후에는 조직적 불순세력이 개입된 징후가 농후하고 따라서 부화뇌동 등 경거망동을 삼가고 질서유지에 적극 협조해줄 것을 당부한다."

현지 상황을 정확히 전달하려면 경찰서장 발표 내용이 진실인지 확인하는 한편 시위 군중이 박 정권 타도를 외친 원인을 취재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경찰의 일방적 발표를 앵무새처럼 옮김으로써 언론의 책무를 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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