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날조 동참한 조선일보

1980년 5월 22일 신군부는 '김대중 씨 수사 중간발표'를 통해 '김대중 일당'을 광주 항쟁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했다. 7월 4일 계엄사는 이른바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 사건'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완전히 조작된 소설이었다. 조선일보는 다음날인 7월 5일자 신문에 이를 대서특필했다.


다음은 당일 조선일보 1면 기사 <김대중 내란음모로 군재회부>다.

조선일보 <김대중 내란음모로 군재회부>(1980.7.5.)
계엄사령부는 4일 김대중의 내란음모 혐의에 대한 수사를 일단락 짓고 김대중과 추종세력 37명은 내란음모, 국가보안법, 반공법, 외국환관리법, 계엄포고령 위반 등 혐의로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계엄사는 발표를 통해 그동안의 수사결과 "김과 추종분자들이 소위국민연합을 전위세력으로 하여 대학의 복학생들을 행동대원으로 포섭, 학원 소요 사태를 폭력화하고 민중봉기를 꾀함으로써 유혈혁명 사태를 유발, 현정부를 타도한 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권을 수립하려고 했음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1면에는 이렇게 계엄사 발표 내용을 다뤘으며 3면과 6면에는 계엄사 발표 내용 전문을 실었다. 2면 상자기사 <한민통의 정체>는 김대중을 거의 간첩으로 몰아가는 정도다. 김대중이 정권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강조하는 내용이다.


다음날인 7월 6일 조선일보는 <다시 생각을 가다듬자>라는 사설을 통해 '김대중 일당의 내란 음모'를 거듭 다뤘다.

조선일보 사설 <다시 생각을 가다듬자>(1980.7.6.)
...독자투고가 말해주는 사태가 마침내 발생하고 말았다. 아니 전방의 병사들이 당부하면서 걱정했던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그 기세는 전국화했고, 불행했던 광주 사태로까지 절정의 증폭성을 보였다. (중략) 5월 이후 우리에게 심대한 상처를 입히고 남긴 일련의 불행한 사태와 미증유의 사건들은 이 역사현실을 착각한 데서 빚어지고 초래됐다.

이 사설은 '김대중 사건'과 관련, 한 독자의 투고 내용이라며 "요즘 되풀이되는 데모로 소란하고 불안한 사회에서 집으로 돌아와 잠들어 있는 어린 자식의 얼굴을 볼 때마다 불안감에 엄습당하곤 한다"고 전제하고 계엄사의 발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며 "사건의 전말이 낱낱이 밝혀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광주에서 상황이 예상치 못하게 악화하자 전두환은 당황했다. 이에 광주의 상황을 김대중과 연계시키는 작전이 개시됐다. 이 작전에 보안사 수사총책인 대령 이학봉을 비롯, 중정 안전국장 김근, 검사 이종남, 정경식 등이 동원했다. 김대중은 후일 당시 받았던 고문에 대해 "며칠이고 잠을 안 재우고 질문하는 것은 매 맞는 것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정말 질식할 것도 같고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어요."라고 회고했다. 신군부는 언론조작의 힘을 빌려 날조극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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