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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의 배경이 된 조선일보의 '총력안보 외침' 받아쓰기

남베트남 정부가 항복했다. 이후 북한이 당장 남한을 공격하려 한다는 구체적 정보는 전혀 없었지만 한국사회에는 '안보열풍'이 불어닥쳤다. 5월 2일 오전 재계·학계·문화계 등 각계 원로급 인사 55명이 참여한 구국동지회(대표 이갑성) 발기총회 및 시국선언대회가 열렸다. 그 모임에서는 <위난의 조국을 위하여>라는 호소문이 채택됐다. 호소문은 다음날 조선일보 1면 하단 5단통 광고로 실렸다.

조선일보 1면 광고 <위난의 조국을 위하여>(1975.5.3.)

호소문은 이렇게 말한다.

공산세력의 집중포화 속에 초토화되고 있는 인도차이나 사태가 이제는 피안의 불로만 볼 수 없게 됐다. (중략) 총력안보라는 지상의 명제를 저해하는 어떠한 독소라도 국민의 이름으로 과감하게 제거되어야 한다.

구국동지회의 시국선언대회를 시작으로 5월5일부터 안보 또는 반공을 외치는 궐기대회가 잇달아 일어났다. 조선일보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그런 모임이나 정치권 동향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5월 10일 '안보궐기대회'는 절정에 이르러 5월 11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를 차지했다.

조선일보 <서울시민 안보궐기대회>(1985.8.11.)
...총력안보국민협의회(회장 이맹기)가 주관한 이날 대회에서 여의도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총력안보 굳게 다져 남침 흉계 분쇄하자" "4천만이 일어섰다 침략 망상 포기하라"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멸공구국대열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혈서·화형...안보 물결> <여학생들도 안보궐기>(1975.5.11.), <사회보안법 통과 협조>(1975.5.13.), <초교파 구국기도회>(1975.5.13.) 등 조선일보에는 이밖에도 '안보 열풍'에 관한 기사가 계속 실렸다. 뜨거운 '총력안보'의 외침을 배경으로 박정희는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를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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