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적 한일회담에서의 조선일보
1962년 10월과 11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일본 외상 오히라와 함께 주고 받은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박정희 정권이 눈앞의 이익을 위해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철저한 반성 및 정당한 배상을 요구하길 포기하고, '청구권'이라는 이름으로 겨우 무상 3억 달러를 요구했음을 보여줬다. 이미 비판 여론이 거센 가운데, 1964년 1월 미국 법무부장관 로버트 케네디가 방문해 박정희와 '한일문제'를 논하면서 미국의 압력에 따른 굴욕적인 한일회담의 서막이 올랐다. 이때 조선일보는 한일회담 관련 보도를 많이 보도하면서도 1월 25일부터 2월 24일까지 유독 사설을 내지 않았다.
결국 분노한 여론은 1964년 3월 광장으로 보여들었다. 3월 24일 서울에서 4.19혁명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조선일보는 3월 25일자 1~3면을 치열한 시위 현장을 전하는 것으로 채웠다.

1면의 사설 <학생들의 현실 참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학생들의 저항을 '애국적 동기'라 평하면서도 거리에서 물러날 것을 권유했다. 예나 지금이나 시민들의 집회에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조선일보의 버릇은 매한가지다.

데모에 참가한 학생 제군은 이미 충분한 의사 표시로 남김없이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이제 냉정한 지성인의 기본적 자세로 되돌아 가야 할 것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시민, 학생들의 저항은 거세게 타올라 6월 3일에는 전국 학생들이 '박정희 정권 타도'를 외치며 전면적 항쟁에 돌입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물리적 진압과 비상계엄 선포로 대응했다. 6월 4일 조선일보 1면에는 박정희의 비상계엄 선포를 그대로 받아쓴 기사들뿐만 있었다. 당시 6월 3일 상황을 전한 보도는 계엄사의 검열관들이 모두 삭제하여 조선일보 1면은 벽돌장을 쌓아 놓은 것처럼 난도질되어 있기도 했다.

6월 3일의 격렬한 시위와 비상계엄으로 연기되었던 한일회담은 그 해 12월 3일 재개되었다. 역시 당시 베트남 전쟁을 확대하던 미국의 압박이 강하게 작용했다. 박정희는 65년 1월 9일 기자회견에서 "금년에는 가부간 매듭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회담 과정에서 한국에 방문한 일본 외상 시이나가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를 거부하면서 여론은 다시 반발했으나 65년 2월, 기본조약 가조인이 진행됐다. 이후 한일협정 체결까지, 조선일보는 간혹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기도 했으나 굴욕적 회담을 반대하던 국민 여론을 전혀 반영하지 않으면서 모호한 '양비양시론'적 태도를 취했다.

조선일보 사설 <한일기본조약의 분석과 어려운 차후의 교섭>(1965.2.23.)은 피상적인 평가를 내릴 뿐 그 어떤 국민적 분노도 표출하지 않았다. 오히려 역사적 반성과 사죄를 거부하고 모호한 말만 늘어놓은 일본 시이나 외상이 '사과 사절'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
기본조약의 가조인을 보았다는 데서 조기 타결의 기운을 한층 고조시켜...(중략)...시이나 외상이 "양국 간에 있었던 불행한 관계에서 연유한 한국 국민의 대일 감정"에 유념하는 '유감의 뜻'과 '깊이 반성하는 바'임을 표명함으로써 '사과 사절'의 역할을 다소나마 대행하였다
당시 여론은 역사적 사과를 거부하고 '청구권'이라는 모호한 명목으로 겨우 3억 달러를 받아내는 한일회담 자체에 엄청난 저항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시이니 외상이 '한일 간 평화선 폐지'를 약속했다고 말하면서 파문이 커졌다. 야당에서는 박정희 정권이 평화선을 양보하고 일본과 암거래를 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조선일보는 3.1정신을 내세워 한국 정부의 대일 교섭 태도를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사설 <3.1정신과 오늘의 한일관계>(1965.2.28.)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왜 3.1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하는 역사의식이 뚜렷이 선 대일교섭을 하고 있는가를 한 번 반성해보라
박정희 정권은 몇 차례 분야별 조약을 가조인하는 등 한일협정에 속도를 붙였다. 이에 시민들은 격렬히 저항했고 65년 4월 13일에는 경찰의 폭력 진압에 동국대 학생 김중배 열사가 희생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더욱 집회가 거세지자 박정희는 4월 16일 휴교령을 내렸다.
결국 1965년 6월 22일, 굴욕적인 한일 청구권협정이 도쿄에서 정식 조인됐다. 이에 대한 조선일보의 평가는 무의미한 수준의 '양비양시론'이었다.

조선일보는 65년 6월 23일 1면 사설에서 이렇게 평했다.
우리의 요구를 최대한으로 관철했다는 정부의 자부이긴 하나, 국민들의 감정의 크기에 비하면 조인된 제 협정은 너무나 기대에 어긋난 감이 있고 어느 정권이 맡아 한들 현재와 같은 여건 하에 그 이상은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에 일말의 동정은 없을 수 없다 할지라도 그로써 국민의 불만을 가라앉히기에는 금후 여간 시련이 없어서는 안 될 형편으로 결착된 것을 우리는 서글퍼한다. 그러나 주사위는 던저졌다...(중략)...오늘 이후 벌어질 일체의 사태에 대하여도 소신에 순할 결의를 잊어서는 안 되리라.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우왕좌왕하며 정부를 비판하지도, 옹호하지도 못하는 조선일보의 안절부절함이 잘 드러난다. 이 한일협정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일본이 제국주의 식민지배 역사를 부정하고 군국주의 부활에 거리낌이 없음을 감안할 때 차라리 침묵하는 게 낫지 않나 싶은 정도의 사설이다. 조선일보는 이 사설에서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고 일어선 젊은 학생들의 건전한 민족주체의식"을 거론하기도 했는데 박정희가 그 학생들을 짓밟으며 한일회담을 강행했으니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