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의 '인혁당 사건' 보도 왜곡
박정희가 고려대에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던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인혁당 사건' 관련자 중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이수병, 우홍원, 김용원과 '민청학련' 관련자 여정남에게 우원심대로 사형을 확정했다. 조선일보는 9일자 7면...
박정희가 고려대에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던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인혁당 사건' 관련자 중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이수병, 우홍원, 김용원과 '민청학련' 관련자 여정남에게 우원심대로 사형을 확정했다. 조선일보는 9일자 7면...
남베트남 정부가 항복했다. 이후 북한이 당장 남한을 공격하려 한다는 구체적 정보는 전혀 없었지만 한국사회에는 '안보열풍'이 불어닥쳤다. 5월 2일 오전 재계·학계·문화계 등 각계 원로급 인사 55명이 참여한 구국동지회(대표 이갑성) 발기총회 및...
박정희 정부는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를 선포했다. 조선일보 5월 14일자 1면은 전부 긴급조치 9호 관련 기사로 채워졌다. 1면 머리기사는 <헌법 비방·개폐 선전 금지>(1975.5.13.)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3일 오후 헌법...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지 9일 만인 1975년 5월 22일, 서울대 학생들이 농대생 김상진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었다. 집회에 합류한 학생 1천여명 가운데 5백여 명은 어깨동무를 하고 교문 밖으로 나갔으나 경찰기동대에 의해 해산당했다. 서울대생...
조선일보의 박정희 찬양은 11월 3일에 치러진 국장 당일 극치를 보였다. 3일 당일 조선일보 2면 사설 <박정희 대통령을 보내며>는 평서문이 아니라 경어체로 쓰였다. 오늘 3천6백만 국민을 국장으로 고 박정희 대통령을 국립묘지에 모십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 청와대 옆의 궁정동 '안가'에서 총성이 울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다. 10월 28일자 조선일보는 1면부터 7면까지 박정희에 관한 기사로 도배됐다. 그 어떤 대통령이나 정치인의 죽음에 대해서 신문이...
1979년 10월 16일 오전 10시경 부산대에서 시위가 시작됐다. "독재 타도"를 외치던 학생 2천여 명은 정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세갈래로 나뉜 학생들은 공방전을 펼치며 시내로 나섰다. 오후 2시경 부영극장 앞에서 학생들의...
10월 29일 신군부의 선두주자인 육군소장 전두환이 합동수사본부 본부장 자격으로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두환이 10.26사건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발표한 것만 보아도 그 시각은 뚜렷이 드러난다. 박정희 피살 사건에 대한 전두환의...
민주화 운동은 노동계에서 크게 일어났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1980년 4월 21일 사북탄광 사건, 곧 '사북항쟁'이 발생했다. 탄광촌 광원들의 어용노조 반대와 임금 인상 시위 투쟁이 그 발단이었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 국내 최대 민영탄광인...
5월 21일은 시민군이 광주에서 계엄군을 몰아낸 날이었다. 조선일보는 이날에도 광주 항쟁에 대해 일언반구의 보도도 하지 않았다. 같은 날짜 사설로 전통불교의 현대화라는 제목으로 부처님 오신 날을 기리는 내용을 보도했다. 반면에 동아일보는...
5월 23일부터 조선일보는 광주에서 임시취재반의 이름으로 기사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 날짜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은 <광주사태 수습 기미>이다. 그러나 내용은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하면서 '난동'이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5월...
광주 민중항쟁은 초기인 1980년 5월 18일과 19일 유혈이 낭자한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 과정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신군부의 강경진압 결정에 따른 필연적 결과다. 공수부대 만행이 광주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고 결국 광주 시민군은 5월...
1980년 5월 31일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발족했다. 국보위는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본 따 만든 일종의 혁명위원회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의장은 최규하 대통령이었지만 실질적 권력자는 전두환이었다. 국보위의...
1980년 5월 22일 신군부는 '김대중 씨 수사 중간발표'를 통해 '김대중 일당'을 광주 항쟁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했다. 7월 4일 계엄사는 이른바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 사건'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완전히 조작된 소설이었다. 조선일보는...
조선일보는 군부의 각종 정책을 홍보하는 나팔수 역할을 충실히 했다. 신군부의 새로운 정책이 나오면 기사와 사설 혹은 특집시리즈 등을 통해 충성스런 지원을 다했다. 컬러TV, 과외금지 정책, 대학 졸업정원제 등을 정성스럽게 다뤘다. 신군부는 거기서...
조선일보는 1980년 8월 5일 '사회악 일소를 위한 특별조치'를 보도하며 그 주체인 국보위 상임위 위원장 전두환을 띄우는 기사를 연속해 보도했다. 8월 9일 1면 머리에는 "미국이 전두환 장군을 지지할 것"이라는 미국 AP통신 기사를 올렸다....
조선일보는 8월 12일 1면 머리에 전두환 인터뷰 기사를 올렸다. <민주·복지·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기사는 전두환을 '새 시대를 영도할 지도인물로 국민적 기대와 관심을 모으고 있는 전 위원장'으로 소개했다. 새 시대를 영도할...
1980년 8월 21일, 육·해·공 3군 주요 지휘관들이 국방장관 주영복 주재로 모여 "국보위 상임위원장인 전두환 장군을 차기 국가원수로 추대할 것을 전군적 합의"했다. 이튿날인 22일 육군대장 전두환이 전역했다. 조선일보 8월 23일자는 가히...
전두환은 1980년 8월 25일 대통령후보로 등록한 뒤 27일 단일후보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날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재적 2525명이 참석한 가운데 찬성2524표, 무효1표로 전두환을 선출했다. 선거 이전부터...
신군부는 1980년 5월 광주 항쟁과 관련해 제작을 거부한 언론인들을 구속한 데 이어 7월 9백 명이 넘는 언론인을 강제 해직시켰다. 그런 다음 1980년 11월 12일 전대미문의 대규모 언론 통폐합 계획을 발표했다. 조선일보는 11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