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통일론'
7·29 총선 기간에 활발해진 통일논의는 ‘중립화통일론’과 ‘남북협상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7월 10일자 조선일보 석간 1면의 사설<통일방안엔 감시 방식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은 사회대중당이 제기한 남북총선거 정책이 안고 있는 문제를...
7·29 총선 기간에 활발해진 통일논의는 ‘중립화통일론’과 ‘남북협상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7월 10일자 조선일보 석간 1면의 사설<통일방안엔 감시 방식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은 사회대중당이 제기한 남북총선거 정책이 안고 있는 문제를...
조선일보는 5월 6일자 석간 1면에 <시도의 가치 없는 남북학생 회담의 제의>라는 사설을 올렸다. 우리는 이 제의된 회담이 비록 학생들 간의 회담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공산당을 상대로 하는 것인 이상 시도의 가치가 없는 것임을 명백히 하여...
1961년 5월 16일 0시 15분경 육군소장 박정희 일파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장교 250명, 사병 3500명이 동원된 대대적 군사 반란이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5.16 군사 쿠데타는 명백히 헌법 위반으로서...
5.16쿠데타 직후, 박정희의 헌법 파괴 반란 행위를 '혁명'이라 칭송하던 조선일보는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 창설을 공표되기도 전에 미리 알고 있는 듯한 기묘한 오보를 내기도 했다. 1961년 6월 6일 1면 <기성정치인은 반성 있기를, 김...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2개월 만인 1961년 7월 반공법 선포에 이어 곧바로 민주당 장면 정부를 '용공'으로 몰며 본격적인 '공포 정치'를 시작했다. 조선일보는 박정희 정권이 연일 발표한 '민주당 장면 정권 용공정책 진상' 담화문을 원문 그대로...
박정희 군사정권은 언론사를 강제로 폐간하고 사주를 '사법살인'하는 등 그야말로 언론의 목을 졸랐다. 1962년 6월 28일에는 '언론정책 25개항'을 발표했고 이는 조석간 복간제를 조간지, 석간지, 일요지 등 단간제로 개편, 통신사는 1~2개로...
박정희는 1961년 8월 12일 민정이양 계획을 발표했다. 요지는 1963년 여름 정권을 이양하고 총선거를 실시하는 한편 정부 형태는 대통령 책임제로 하겠다는 것이다. 이 8.12 성명의 진의는 사실상 민간에 정권을 순순히 이양하지 않겠다는...
5.16쿠데타 당시 '민정이양'을 약속했던 박정희는 그 후 몇 차례 말을 바꾸면서 이른바 '민정이양 번의'라는 희대의 논란을 자초했다. '군복 벗으면 민정 참여 가능'이라는 조야한 논리를 내세웠던 박정희, 그러나 1963년 2월 미국 케네디...
결국 민정이양 약속을 뒤집은 박정희는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를 겨우 15만 여표로 따돌리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민정이양 번의' 논란 때마다 박정희를 지지했던 조선일보는 역시 당선을 반기며 축하를 표했다. ...간신히...
1962년 10월과 11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일본 외상 오히라와 함께 주고 받은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박정희 정권이 눈앞의 이익을 위해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철저한 반성 및 정당한 배상을 요구하길 포기하고, '청구권'이라는...
서울시는 개발 붐을 일으키려 광주대단지가 '신천지'가 될 것처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투기자본이 몰려들어 분양증을 사들이려고 경쟁을 벌였다. 대단지에 남은 나머지 3분의 2 가량의 사람들은 언저리 싼 땅을 사서 판잣집을 지어야 했다. 서울...
군사 반란으로 정권 초기부터 여론이 좋지 않았던 박정희 정권은 굴욕적 한일회담으로 언론인들로부터 숱한 비판에 직면했다. 박정희는 언론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털어놓았으며 결국 1964년 7월 30일, 공화당으로 하여금 '언론윤리위원회법'이라는...
70년대 초 사법 파동과 광주대단지 사건 등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가 고조되자 대학가에서 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졌다. 1971년 9월부터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 등 대학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당면 요구는 학원에 침투한...
박정희는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여론의 눈을 돌리고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폭압적 방식을 동원했다. 바로 10월 유신이다. 1972년 10월 17일 서울 시내에 군 병력이 배치됐고 광화문 부근에는 탱크까지 나왔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유신체제가 출범하자 오래 지나지 않아 시민들의 반발과 저항이 시작됐다. 시작은 1973년 4월 22일, 기독교의 젊은 성직자들과 학생들이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유신독재를 규탄한 유인물을 배포한 사건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내란예비음모로 규정해...
1973년 8월, 한국 정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항상 꼽히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 벌어졌다. 후일 20년도 더 지나서야 밝혀진 사건의 진상은 박정희가 지시해서 벌어진 중앙정보부 공작원들의 살해 미수 및 납치였다. 사건 당시에도 김대중...
1971년의 위수령 및 군대의 학원 난입, 대거 강제 징집으로 학원가의 저항이 당분간 잠잠했으나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기로 1973년 8월부터 다시 학생들의 반유신 투쟁이 시작됐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학생들이 기습적으로...
1973년 말, 학생들의 반유신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갖은 탄압에도 끊이지 않고 함석헌, 장준하, 백기완 선생 등 재야 민주화 인사들을 주축으로 유신 헌법 철폐 개헌서명운동도 이어졌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역시 탄압으로 대처했다. 1973년...
쿠데타와 폭압으로 권력을 연장한 박정희의 철권통치는 폭주하여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1974년 4월 3일 박정희는 긴급조치 4호를 내놓고 시위를 하면 학교 폐고, 위반자 사형 등 섬뜩한 조치를 선언했다. 여기에는 '민주청년학생연...
조선일보가 파면 기자 백기범과 신홍범을 복직시키겠다는 약속을 3개월이 지나도 지키지 않자 한국기자협회 조선일보사 분회는 1975년 3월 6일 긴급 임시총회를 열고 편집국장단의 인책 사퇴를 요구하는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장 방우영은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