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반민족 행위'사죄하지 않은 복간호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 복간호가 나왔다. 1940년 8월 10일에 폐간된 지 5년 3개월 13일 만에 같은 제호로 발행을 한 것이었다. 지령은 폐간호의 6932호를 이어받아 6924호로 했다. 자체 인쇄시설이 없어 서울신문(옛...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 복간호가 나왔다. 1940년 8월 10일에 폐간된 지 5년 3개월 13일 만에 같은 제호로 발행을 한 것이었다. 지령은 폐간호의 6932호를 이어받아 6924호로 했다. 자체 인쇄시설이 없어 서울신문(옛...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는 1946년 1월 4일자 신문 1면에 ‘연두소감’을 실었다. 제목은 <통일일로>이다. 나는 이제 당분간 완전 자주독립국가가 설 때까지 나 개인의 고집인 ‘임정지지’를 보류하고 오로지 통일국가 건설에 매진할 생각이다. 3천만의...
조선일보 8월 15일자 1면에는 종전의 중요한 날들과 달리 이승만의 <소감>이 김구의 <발표문>보다 돋보이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50년 전에 우리 2천만 다 각각 국가생명을 위하여 자기생명을 희생하기로 결심하였다면 우리가 다 살 수 있었을...
조선일보는 10월 4일자 2면에 ‘대구사건’에 관한 미군정청의 발표를 그대로 옮겼다. 공전의 불상사인 대구사건에 대하여 조병옥 경무부장은 그후 경과를 4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현재가지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경찰 측 피해자는 사망자 53명이...
1947년 10월 17일 미국은 미·소 점령군 관할구역에서 유엔감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각각 선거를 치르자는 결의안을 유엔총회에 제출했다. 유엔 정치위원회는 10월 30일, 미국이 낸 원안대로 한국 임시위원단을 설치하고,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는...
조선일보는 1948년 2월 19일자 1면에 <북조선 정권 수립설을 듣고>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실었다. 작일 내외의 보도는 북조선인민공화국 선포설을 전하고 있다. 북조선 정권의 존재는 그 선포 유무를 막론하고 이미 단독정권의 형태를 가지고 있음이...
조선일보는 뒤늦은 4월 6일자 2면에 ‘4·3사건’을 토막기사<제주도 경찰관서 피습 / 시내 수개처에서 발생>로 보도했다. 조병옥 경무부장 담에 의하면 4월 3일 제주도 일대에 경찰서 피습사건이 돌발하였다고 한다. 경무부에 보고된 현재까지의 피해...
조선일보는 7월 21일자 1면에 <초대 대통령에 이 박사>라는 사설을 실었다. 이 박사는 구국혁명의 노투사의 한 분이다. 어떤 비방과 중상이 있건 이 박사의 과거가 이를 증명하고 있고 민족적 영도자의 지위를 엄연히 가져 왔다. 일찍이 기미...
현역 국회의원들이 명백한 증거도 없이 구속되고 무장경찰대가 반민특위를 해가 훤히 뜬 아침에 습격하는 중대한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조선일보의 보도는 소극적이었다. 조선일보는 세 의원이 구속된 지 이틀 뒤인 5월 20일자 2면 중간에<이문원 최태규 양...
조선일보는 10월 28일자 1면 머리에 ‘여순사건’에 관한 사설<반란의 속보를 듣고>을 처음으로 올렸다. 지난 20일 여수에서 국군 반란이 일어났단 보도를 듣고 우리가 제일 염려한 것은 인명의 살상과 시설의 파괴에 대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대통령인 이승만이 헌법이나 하위법들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유사 국가기구들’을 잇달아 만들어내던 시기에 조선일보는 이렇다 할 만한 비판을 하지 않았고, 그런 단체들이 일으키는 폐단을 지적한 적도 거의 벗었다. 국가보안법 제정에 적극적으로...
북한이 남한보다 엄청나게 우세한 병력과 무기를 앞세우고 쳐내려왔다면 초기의 전세가 남한에 불리할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국방부는 고의적으로, 또는 국민의 ‘사기 진작’을 위해 거짓 보도자료를 남발했다. 다른 신문들은 물론이고 조선일보도...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 날이자 광복절인 8월 15일자 조선일보 사설<해방의 날 독립의 날 / 제2대 대통령 취임을 경하함>은 그에게 극진한 찬사를 바쳤다. 8월 15일은 국경일이다. 이날은 광복 7주년 기념일이며 대한민국 독립선포 4주년...
조선일보는 개헌안 부결에 관한 기사가 올라 있는 11월 29일자 신문1면에< 개헌안 표결 결과를 보고/ 새 동기로 정무에 전력하도록>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내보냈다. 이제 개헌안의 표결로써 개헌문제는 국회로서나 정부로서나 또 일반 국민으로서 다시...
대통령선거는 이승만, 신익회, 조봉암(무소속)의 3파전이었는데, 그 가운데서 신익회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그의 유세는 5월 3일 서울 한강 백사장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150만 여명이었는데 무려 30만명이 넘는 인파가 백사장에...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정작 국회 본회의에서 날치기로 통과되자 조선일보는 12월 25일자 1면에 온건한 논조의 사설<국가보안법 강행과 민주정치의 기로>을 올렸다. 그러나 양음의 상반되는 두 갈래의 현상은 오늘 1958년 성탄절 전일에 합류하고...
조선일보는 1958년 1월 13일자 석간 3면 머리에 <조봉암 씨 등 3명을 연행 / 12일 새벽부터 검찰서 모종 중대사건 수사 / 당국자는 내용 일체에 함구불언 / 평화통일 내막 규명 / 검경·아연 긴장리에 활동>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은 이래...
1960년 3월 2일자 조선일보 석간 1면 머리에는 ‘뜬금없는’기사가 올라 있었다. 제목은 <학생 동태 정계서 중요시 선거 관여 대책을 논의 자유당, 대구사건 원인도 재조사>였다. 자유당은 지난 28일에 일어난 대구 학생 ‘데모’사건과 지난...
3월 16일자 조선일보 조간 1면 머리에는 <마산에 일대 소요사건! 학생·시민들 자서 습격코 방하>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경남지사 기자의 ‘지급전’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기사는 몇 문장 뿐이었다. 15일 하오 6시부터 동 9시반까지 사이에...
지역에 따라 가입자 수에 큰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전국 교원의 22%가 가입한 교원노조는 한국의 교육은 물론이고 정치, 사회, 문화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시기의 조선일보 지면을 보면 교원노조에 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