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여당 출현에 대해서는 지적못하는 동아일보
1990년 1월 22일 사설 <3당 합당 선언의 충격-국민 설득할 뚜렷한 명분 있어야 한다>은 ‘충격’만을 강조할 뿐, 그동안 동아일보가 주장해 왔던 야권통합이 무산되고 범보수 거대 여당이 출현한데 대해서는 문제 제기의 어조를 극도로 낮추었다....
1990년 1월 22일 사설 <3당 합당 선언의 충격-국민 설득할 뚜렷한 명분 있어야 한다>은 ‘충격’만을 강조할 뿐, 그동안 동아일보가 주장해 왔던 야권통합이 무산되고 범보수 거대 여당이 출현한데 대해서는 문제 제기의 어조를 극도로 낮추었다....
치사 정국에서 분신 정국으로 불길이 옮겨 붙으면서 일정 부분 시위대의 입장에 서서 노태우 정권에 각을 세웠던 동아일보도 ‘정원식 사태’가 터진 뒤인 6월 5일자 <가투는 이제 그만둘 때다>라는 사설을 싣고 재야운동권의 자숙을 당부했다. 그 사설은...
9월 28일 안기부는 장기표 부부 등 6명을 대남 거물간첩 이선실을 접촉하고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불고지 혐의로 구속했다고 발표하면서 내달 초 60명 규모의 간첩단 사건을 국민들에게 알리겠다고 예고했다. 그리고 10월6일 ‘남한조선노동당’사건을...
여야 정쟁이나 부정선거 문제 등에 관해서는 균형을 지키고 공정을 지향하려고 애쓰던 동아일보도 ‘간첩 사건’에 있어서 다른 신문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허둥대는 모습이 역력했다. 7일자 사설<남한 조선노동당 사건의...
대선일을 사흘 앞둔 1992년 12월 15일자 동아일보 2면 사설<이것이 중립인가><국민이 감시자가 돼야 한다>라는 두 편의 사설이 나왔다. 국민당이 증거물로 제시한 녹음테이프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대화도 으스스하다. 그들이 바라지 않는...
김영삼 정권이 금융실명제를 실행할 것이라는 루머는 취임 전부터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동아일보는 취임 며칠 전 <경제가 뒷전으로 밀린다>라는 사설을 실었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갖가지 대선 공약이 이행되기 직전이다. 희망적인 관측이라면...
동아일보는 8월 26일자 사설<저성장의 타성이 두렵다>에서 “지난 12일 전격 실시한 금융실명제가 아무리 장기적으로 경제에 좋고 사회정의에 맞는다 해도 단기적 타격은 어쩔 수가 없다”고 걱정하더니 9월 20일자 사설<실명제 보완과...
1994년의 남북관계는 이미 봄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북한은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면서 핵 개발을 공식화했고 미국은 당연히 그것을 막으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4년 3월 19일 남북 특사 교환을 위해 실무...
처음에는 국민들도 앞뒤 맥락을 자른 ‘불바다’직격탄을 맞은 것 치고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비근한 예로 현충일이 낀 6월 첫 연휴기간의 분위기를 들 수 있다. 1994년 6월 15일 ‘오늘과 내일’<한반도의 위기 수준>도 그 문제를 다뤘다....
김일성 조문 파동이 한창이 가운데 동아일보는 20일자 사설<그래도 교수가 나서야>을 통해 박홍의 발언을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박홍 서강대 총장은 김영삼 대통령 주재로 열린 대학총장 간담회에서 주사파 뒤엔 사노맹, 그 뒤엔 북한 사노청, 그 뒤엔...
8월 26일자 동아일보는 1면 기사<“주사파 1만 5천~3만명 설도” 박홍 총장 / 87~94년 대학 학생회 간부 거의 포함 여의도 클럽 토론회서 밝혀>에서 박홍의 발언 내용을 비중 있게 전했다. 학생들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일부 학생들이...
동아일보는 하루 휴간일을 보낸 뒤 4월 5일자 사설<북한의 전쟁 협박>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북한이 전쟁 위협을 일삼는 가장 큰 이유는 남북한 간의 긴장 분위기를 조성, 체제 내부의 동요를 막아 보겠다는 탄압정책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또...
동아일보의 ‘북한 소동’ 부풀리기는 선거 바로 전날인 4월 10일자에도 집요하게 전개됐다. 1면 머리기사는 <혼전지역 총력 지원 4당 막판 ‘표 굳히기’>인데도 함께 게재된 사진은 군인들이 백령도에서 대북 경계를 하고 있는 ‘연출된 장면’...
1996년 8월 연세대가 있는 서울 신촌은 전쟁터였다. 8월6일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13~15일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초청장을 전달하기 위해 소속 대학생 2명을 북한에 파견했다고 발표했다. 사상 문제에서만은 ‘주사파...
시위의 규모가 커지면서 한총련 학생 등 7천여 명이 참여한 13일의 시위는 동아일보 14일자 1면에 <‘통일 축전’도심 격렬 시위 한총련 7천여명 집결 연대 등서 경찰과 충돌>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왔다. 한총련의 ‘극렬 폭력’을 체제 도전 행위로...
동아일보는 정부의 무능을 질타하며 강력한 진압을 요구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17일자 1면 기사<“한총련 지도부 완전 근절” 폭력시위 전원 검거 엄단>을 실었다. 정부와 신한국당은 한총련 시위의 불법 폭력성이 국가 기강을 위협하는 수준에 까지...
IMF 협상안에 대한 본격적 보도는 다음날인 12월 2일자에 집중됐다. 1면 머리에는 <내년 경제성장 2.5%~3% 내 종금사 10개 미만 월내 정리>라는 기사가 올랐고 <“한국 경제 기초 튼튼…1년 반 후 정상화” 킹드쉬 IMF 총재>라는...
1997년 7월 11일 동아일보에는 온통 황장엽의 ‘전쟁 경고’와 그가 갖고 있다는 ‘리스트’에 흥분한 기사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동아일보 지면에서는, 황장엽이 아무리 고위직에 있었다 하더라도 연로한 학자인 출신 그가 어떻게 극비의 군사기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