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선거를 앞두고 극단적인 논조를 펼침
선거일인 5월 10일을 열흘 앞두고 1948년 4월 30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 실린 사설<총선거에 궐기하라>은 총선을 통해 세워질 ‘국민정부’가 ‘전 조선을 대표’할 수 있다는 극단적 논조를 펼쳤다. 5월10일의 총선거는 우리가 염원하던...
선거일인 5월 10일을 열흘 앞두고 1948년 4월 30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 실린 사설<총선거에 궐기하라>은 총선을 통해 세워질 ‘국민정부’가 ‘전 조선을 대표’할 수 있다는 극단적 논조를 펼쳤다. 5월10일의 총선거는 우리가 염원하던...
제헌국회는 7월 12일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해서 17일에 공포했다. 7월 20일에 국회에서 치러진 대통령 간접선거에서 이승만 180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동아일보 7월 21일자 1면에 실린 기사<대한민국 정부 대표 선출> 이렇게 시작된다....
대통령 이승만은 10월 22일 오전 기자단과 회견을 갖고 여순사건에 관해 질의응답을 했다. 동아일보는 23일자 1면 머리에 그 내용을 보도했다. 문: 북한정부의 남한에 대한 공세가 혹심한데 구체적 대책 여하? 답: 북한에서 현재 여러 가지로 활동...
학도호국단은 1949년 3월 8일에 창설되었다. 동아일보는 서울에서 중앙학도호국대가 결성되는 4월 22일자 1면에 <학도호국대와 조국의 진로>라는 사설을 실었다. 학도의 임무는 지·덕·체의 원만한 발전에 있다는 의미에서 또 학도의 군대화는...
북한 인민군이 남한을 공격하기 시작한 1950년 6월 25일 현재 양측의 전력을 비교하면 북한이 훨씬 앞서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군이 먼저 38선 전역에서 남쪽으로 기습공격을 가해왔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능히 추측할 수 있는...
동아일보 6월 27일자 1면에 실린 사설<괴뢰 침공에 총력적 방위> 역시 국방부의 허황한 발표를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근거 없는 ‘안도감’을 심어주려고 했다. 지난 25일 오전 5시를 기하여 이북 괴뢰군은 38선 전역을 침범했다. 물론 충용 무비한...
국회가 국민방위군 사건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 신성모는 ‘국방부장관의 책임 아래 있는 본 사건의 책임자 김윤근을 국회에서 조사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서민호는 4월 25일 국회에서 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그런데 동아일보에는 그...
동아일보는 1958년 1월 13일자 석간 3면 머리에 ‘진보당 사건’에 관한 ‘사찰진’의 발표를 크게 보도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의 수사는 과거 오는 민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진보당에 대한 침투공작을 전개해오던 수 건의 괴뢰 ‘간첩 사건’과 또한...
동아일보는 1960년5월30일에 <이 박사의 망명>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 부처는 29일 이른 아침 표연히 망명의 길을 떠났다. 두말 할 것도 없이 4·26혁명 성취와 함께 이 박사의 하야는 10유2년동안 자유당 정권 아래서...
10월 8일에 나온 서울지법의 6대 사건 판결에 대한 비판과 불만이 여러 곳에서 폭발했다. 동아일보는 10월 12일자 석간 1면 사설<비상사태를 수습하는 길>에서 장면 정부가 특별법 제정에 소극적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지난 8일 부정선거...
지역에 따라 가입자 수에 큰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전국 교원의 22%가 가입한 교원노조는 한국의 교육은 물론이고 정치, 사회, 문화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1960년 4월 말부터 시작된 교원노조 운동을 외면하던...
7·29총선 기간에 활발해진 통일논의는 ‘중립화통일론’과 ‘남북협상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동아일보는 7월 10일자 석간 1면에 <통일방안을 정쟁 도구로 말라>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통일방안이 선거의 인기전술로서 악용당하고 있는 것은...
보수언론은 서울대 민통련 발기와 그 단체의 그 단체의 ‘통일론’에 대해 장면 정권보다 훨씬 더 극렬한 반응을 보였다. 동아일보가 11월 3일자 석간 1면 올린 사설<너무도 천진난만한 통일론>이 대표적인 보기이다. 4월 혁명 이래의 학생층의 동향은...
3월 22일 서울시청 앞에서 벌어진 집회와 시위는 4월 혁명 이후 규모가 가장 크고 격렬한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3월 23일자 석간 3면 머리에 장면 정부 내무부장관의 담화를 크게 보도했다. 신 내무부장관은 23일 상오 22일 밤의 제모 사태에...
3·22 대회 이후 서울에서는 더 이상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여러 지방에서 2대 악법 반대투쟁이 계속되었다. 23일 부산에서 경상남도 학생 공투위 주최로 열린 ‘악법 반대 경남 학생 총궐기대회’에는 1만여 명의 시민과 학생이 모여 “배고파 못...
동아일보는 1951년 1월 27일자 2면에 ‘모종 중대 사건’이라는 표현으로 국민방위군 사건을 암시하는 기사<모종 중대 사건 발생? / 3부 합동조사반 맹활동>을 처음으로 실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사건은 당연히 객년 크리스마스 전에 발포된 이...
10월 25일 국군 제6사단 7연대가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했다. 그러자 대통령 이승만은 10월 29일 오전 8시 35분 미군 특별비행기를 타고 평양으로 날아갔다. 그는 평양시청 앞에 모인 군중 10만여 명의 환영을 받으면서 ‘민주 쟁취를...
5월 16일 오전 동아일보는 ‘호외’를 통해 <오늘 미명 군부서 반공혁명>이라는 제목으로 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한 반면, 조선일보는 <오늘 새벽 군부 쿠데타>라고 표현했다. 그날 오전 9시 ‘군사혁명위원회’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포고...
동아일보는 9월 15일자 2면에 <가슴 아픈 정치풍토>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올렸다. 우리 역사는 또 하나의 슬픈 페이지를 기록했다. 14일 새벽 국회는 이윽고 이번 개헌안도 변칙적으로 처리하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본란은...
동아일보는 5월 23일자 석간 1면 사설<내핍·근로의 기풍을 활발히 전개하자>을 통해 ‘혁명정부’가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장도영 내각수반은 22일 5개 항목에 걸친 범국민운동 대강을 발표한 바 그중 제2 및 제3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