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과 '반민족'행위에 대한 반성이나 사죄 없는 동아일보
1945년 12월 12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는 <중간사 / 주지를 천명함>이 실렸다. 천도 무심치 않아 이 강토에 해방의 서기를 베푸시고 성주의 신의, 무궁하시어 이 천민에게 자유와 활력을 주시니, 이는 오로지 국사에 순절한 선열의 공덕을...
1945년 12월 12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는 <중간사 / 주지를 천명함>이 실렸다. 천도 무심치 않아 이 강토에 해방의 서기를 베푸시고 성주의 신의, 무궁하시어 이 천민에게 자유와 활력을 주시니, 이는 오로지 국사에 순절한 선열의 공덕을...
1945년 12월 28일 미국, 소련, 영국의 외상들이 소련 수도 모스크바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에 관한 ‘결정’을 발표하기 직전인 12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는 모스크바 3상회의가 한국 신탁통치에 관해 내릴 것으로 예상되는 ‘결정’에 관한...
동아일보는 1946년 1월 1일자 1면에 실은 <신정일언>을 통해 ‘반탁’은 무조건 옳다고 주장했다. 타력의 환멸을 만끽한 우리는 자력의 고귀를 더욱 더 통감하였거니와 신정 벽두에 맹서할 3천만의 일관한 신호는 오직 “자력으로 최후의 일인,...
1946년 3월 1일은 조선인들이 해방 뒤 처음으로 맞이하는 ‘3·1절’이었다. 이날을 하루 앞둔 2월 28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격정적인 내용의 사설이 실렸다. 기미운동이 원래 순일무잡한 전 민족적 단일전선이었으므로...
미국정 청은 초기에는 조선인들에게 언론자유를 보장하겠다고 속했지만 찬탁과 반탁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몰아치던 1946년 5월부터 좌파 언론에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탄압은 이른바 ‘정판사 위폐 사건’을 빌미로 한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에...
1945년 12월 1일 복간된 동아일보는 1946년 8월 15일 첫 번째 ‘광복절’을 맞았다. 이 날자 1면 머리에는 <새나라의 첫 날 / 8·15기념일의 주지와 기치>라는 ‘거창한’내용의 사설이 올랐다. “희망에 살자!”그리고 “자력을 믿자!”...
1946년 10월 2일 대구에서 끔찍한 사건이 터졌다. <한국근현대사사전>‘10월 항쟁’항목에는 그 경위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초기의 총 파업은 전평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으나, 이후 전국각지에서 발생한 민중의 항쟁은 이미 공산당의 통제를 떠나...
통일을 위해 정당과 사회단체를 망라하는 ‘총본부’를 두겠다고 밝힌 이승만은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했다. 민총의 총재는 이승만, 부총재는 김구였다. 민총은 그 이후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강력하게 퍼나갔다. ‘단정’을...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좌익과 우익 대표들이 합의해서 결정한 ‘7원칙’이 실시된다면 먼저 남쪽에서 북쪽에 대해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의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남과 북의 인구 차이 때문에 현실적으로 장벽이 높겠지만,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1947년 새해가 되자 동아일보는 1월 1일자 1면 머리에 올린 사설<3·1적 3대 계명 / 대포용, 대희생, 대용맹>을 통해 극좌와 극우의 독선을 비판하며 대승적 단합을 촉구했다. 공식에 사로잡히고 종파에 굳어진 대로 음성의 지하적 수법과...
1947년 1월 20일 입법의원에서 이승만 추종자들과 한민당 의원들은 중도파 의원들이 기권한 가운데 ‘반탁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동아일보는 1월 22일자 1면 머리에 <입의에서 반탁을 결의 / 전 민족의 총의를 표시 / 신탁 반대안을 상정 /...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동아일보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던 5월 27일자 1면 머리에 <공위와 민족진영>이라는 사설을 올렸다. 이제 민족진영이 공위에 대하여 신탁통치 내용 여하, 민주주의 해석 여하에...
미국이 조선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기로 한 것은 모스크바 3상회의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조선에 민주적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한 것을 무효화한 방침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유엔 총회에 조선 문제가 상정되면 미국이...
1947년 9월 23일 유엔 총회는 조선 문제를 상정하기로 의결했다. 미국이 조선 문제를 유엔에 상정함에 따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백지화할 수밖에 없게 되자 소련은 9월 26일 양군이 조선에서 동시에 철수하자고 제안했으나 미국은 바로 이튿날...
1948년 1월 7일 입국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북한지역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소련은 1월 22일 그것을 거부한다고 공식으로 발표했다. 그런 상황에서 김구는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 보낸 <의견서>를 통해 단독정부를 반대함을 명확히 하면서...
동아일보는 ‘4·3항쟁’이 터진 지 사흘 뒤인 4월 6일자 2면 하단에 <4일 제주도서 / 총선거 반대 폭동 / 사상자 12명 발생>이라는 기사를 2단으로 내보냈다. 내용은 단 몇 줄뿐이었다. 5일 시공관에서 개최된 총선거 촉진 대강연회 석상에서...
남한 단독총선거를 사흘 앞둔 5월 7일자 동아일보 2면에 <제주도 촉동현지 답사>라는 장문의기사기 실렸다. ‘본사 정준수 특파원 발’ 된 기사 제목은 <피의 제장으로 변모한 / 남해의 고도 제주 / 평화스런 낙토에 / 파괴책동의 선풍>이다....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방송을 통한 북의 제의에 대해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남북회담에 응하겠다고 밝혔다. 4월 1일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강하게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4월 2일자 1면에 실은 <‘남북협상 찬성은 / 소련 목적에 추종>이라는...
조선일보가 평양회담의 전개 과정을 객관적으로 보도한 것과 달리 한민당을 대변하던 동아일보는 남북협상 관련 기사를 전혀 내보내지 않다가 4월 27일자 1면 머리에 <남북협상의 모략성>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우리는 일찍이 임정 요인의 일부분이...
김구와 김규식이 서울로 돌아온 이튿날인 5월 6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귀남한 정객의 / 금후 태도가 주목 / 재편파와 선거 반대파로 대립>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남북협상의 비민주성과 모략성과 더불어 그 의도에 관하여서는 수차 지적한 바 있거니와...